공포_포비아(phobia). 공포는 나를 잠식시키는 여러 감정들 중 단연 으뜸이다. 공포에 한번 잠식되면 헤어 나오기가 너무 버겁다. 생각으로부터 파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마비시키며 때로는 육체까지 얼어붙게 만든다.공황_패닉(panic) 상태로 순식간에 빠져들게 하는 공포.
띠리리릭 인터폰이 울린다. "택배 문 앞에 두고 갈게요" 기사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감사합니다" 샤워를 하다 말고 나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건으로 대충 휘감고 다시 인터폰을 켜 문밖을 모니터로 내다봤다. 흑백 모니터(오래된 아파트라 인터폰 모니터가 흑백이었다)에 기사님의 헬멧이 보인다. 아직 안 가신 건가? 웨에에에에엥. 소방 사이렌이 울린다. 뭐지?!!!!!!!! 현관문에 매달린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뿌연 연기가 엘리베이터 앞 복도를 채웠다.
"관리실이죠? 109동 701호에 지금 빨리 좀 와주세요. 소화전이 계속 울리고 연기가 나요!!" 다급한 목소리로 발발발 떨면서 관리실에 전화했다.
택배기사를 위장해 강도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를 봤다. 택배기사님이 문 앞에 택배를 두고 간다고 했는데, 몇 분이 지나도록 문 앞에 계셨다. 택배는 문 앞에 있지만, 택배기사님도 문 앞에 있다. 나는 현관문을 열면 안 된다. 택배기사를 위장한 강도일 수도 있다. 소화전이 울린다. 연기가 난다. 불이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내가 문 열기만을 노리고 있다. 택배기사가 아니다. 강도다. 불이난게 아니다. 강도다!!!
119에 전화를 하지 않고, 관리실에 전화를 먼저 한 이유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는 팽팽 돌아갔고, 판단은 빠르게 이어졌다.
"오늘 회식이라 가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강도가 문 앞에 있는데 회식이라고? 야간 담당자도 안 남겨두고?? "되도록 빨리 와보시라고요!" 가뜩이나 하이톤인 목소리인데 신경질까지 보태 소리를 질러댔다. 이럴 때가 아니야. 관리실과 전화를 서둘러 끊고, 경비실로 인터폰을 했다. 안 받으신다. 소화전은 여전히 울리고 있다. 강도가 아니라 진짜 불이면 어떡하지?? 현관문을 통해 연기는 들어오지 않고, 냄새도 아직 안 난다. 현관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밖을 또 내다본다. 아직도 사람이 있어. 어뜩해.. 공포에 이어 절망에 빠진 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통화버튼은 눌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관리실인데요" 네네. "경비실에서 가봤는데요. 소화전 오류라고 합니다. 걱정 마세요" 정말요? 진짜요? 몇 번이나 물었고, 몇 번이나 확인을 받은 후 감사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회식 중에도 관리실은 경비실에 연락을 했고, 우리 동 담당자분은 순찰 중이시라 타동 경비담당자님이 들러보셨다고 한다. 현관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다. 아까까지만 해도 뿌옇던 문밖은 맑고 선명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란스럽게 울리던 소화전은 세상 고요하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작은 택배상자가 고이 놓여있다.
기쁨은 나를 미친년처럼 춤추게 하지만 공포는 나를 미친년으로 만든다.
공포_포비아(phobia)라는 감정이 공황_패닉(panic) 상태에 이르게 하기까지 채 오분이 걸리지 않았다. 나를 잠식시키는 여러 감정들 중 '공포'가 으뜸 중의 으뜸이 된 사건이었다.
이렇게 공포심이 극심한 내게 아이의 특성화고 진학은 또 다른 공포심을 들게 했다. 기계공으로 3년을 보내게 될 아이의 안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안전. 놀다 다치는 일은 너무 많았지만, 기술을 익히다 다치는 경우는 겪어본 적이 없어 더 불안했다. 놀다 다쳐도 마음이 아픈데, 기술을 익히다 다치면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이미겪은 경험에 감정을보태 상상까지 불어넣으니 공포심이 배가 되었다. '기술이 최고'라는 말로 아무리 포장을 해봐도, 마음 한 구석에 시린 칼바람이 불어왔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공들인 만큼, 나도 아이에게 공들여야 하는데 해줄 게 없다.
_ 90분 동안 진행된 졸업식 단상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에서 성인이 된 아이의 졸업식은 제게도 의미있더라구요. 특성화고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엄마라는 이름이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것만큼이나 낯설었습니다. '특성화고 엄마'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아이는 졸업을 했습니다. 뒤돌아서면 까먹는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졸업식만이라도 기억하자 싶어 쓰기 시작했는데 90줄, 900줄 점점 길어집니다. 9000줄까지는 안 갈 수도 있고,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9000줄이라는 어감이 좋아(뭔가 대단히 길어 보이기도 하고) 소제목으로 얹어봤습니다. [ form_ Arisa ]
_ 아이가 3년 동안 입던 작업복입니다. '안전제일' 저 마크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시렸던지요. 당시 제 마음을 저의 어깨뽕이자 저의 최작가가 잘 기록해 줬습니다. 최작가의 브런치 글을 연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