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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육아휴직 선언 (절망편)

너 팀장 안달거니?

by 마마멜

*전적으로 아내의 시선에서 본 남편의 육아휴직 과정입니다.




남편의 육아휴직 선언 (절망편)

너 팀장 안달거니?




남편이 육아휴직 이야기를 회사에 꺼낼 때부터 마지막 결재를 받던 순간까지,

우리는 2025년 남자 육아휴직 현실의 민낯을
몸소 경험했다.



아직은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을 쓴다는 건 고달픈 과정이구나, 정당한 권리니까 당연히 써야한다고 말하는 건 현실에선 비현실적이라는 걸 알았다.


남편 회사는 여초회사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업계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회사다. 그런데도 여직원들조차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무를 마음 편히 쓰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들은 더 할 것도 없었다. 남편 말로는 지금까지 육아휴직 쓴 남자 직원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그나마도 육아휴직을 썼던 남자직원들은 소위 회사에서 '일 못하는 사람'이거나 '사고를 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사실관계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회사에서 '일잘러'로 통하던 남편이 육아휴직 선언을 했다는 건 회사에서 꽤 큰 사건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그래도 자신감이 있었다.

승진을 인생의 목표로 두지도 않았고, 업무야 돌아와서 다시 잘하면 된다고 했다.

윗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듣는 것도 예상했지만 그것도 이곳에서 자신의 선택의 결과라며 크게 개의치 않았다. 동료들도 남편의 도전(이라고 써야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응원하고 길을 터달라고 부탁했다.



유일하게, 그러나 가장 커다란 존재로 남편을 불편하게 했던 한사람이 있었다.


50대 본부장이라는 이 분은, 남편이 신입사원일 때부터 남편의 회사생활에서 자주 언급되던 분이다.

흔히 말하는 성실한 꼰대.


늦게까지 야근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꼭 한소리 놓고,

연차 주말 상관없이 필요하면 바로 전화해서 업무를 확인 하는, 그야 말로 요즘 사람들이 꺼려하는 꼰대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항상 그분을 묘사할때

'그래도...' 를 꼭 덧붙였다.


그래도...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서 업무를 하신다.

그래도... 사고가 터지면 유일하게 책임지는 분이다.

그래도... 회사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분이다.


남편 말로 그분은 "너네 칼퇴하는거 보니 일없냐?" 라고 해도 아랫사람들이 "그러지좀 마세요"라고 응수하면, "어험, 요즘것들.."하고 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희생과 성실함이 역량인, 한 때 잘 나갔지만 세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열정꼰대.

남편 입장에선 거기에 약간의 리스펙, 안타까움, 애증 같은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 했다.


익히 들어온 그분의 캐릭터에 걸맞게 남편의 육아휴직 선언을 듣고 제일 길길이 날뛴 사람도 그 본부장이었다.


"너 어쩌려고 그러냐?"

"너 팀장 안달거냐?"

"육아휴직을 왜 쓰려는지 이해가 안간다."


요즘 mz사원들에게 함부로 꺼냈다간 정말 골로 갈수 있는 워딩들이었다. 남편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투였지만 솔직히 많이 신경쓰는 듯 했다.


정말 길길이 날뛰고 싶었던 건 나였다. 나는 원래 주어진 권리를 눈치 보느라 쓰는 건 결국 본인의 결단 문제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경험해보고 알았다. 육아휴직은 좀 다르다.

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라 해도, 가까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쩔수 없이 업무 부담을 주고 떠나는 입장이 된다는 걸.

그래서 더 윗사람의 지지와 응원이 절실하다는 걸 내 육아휴직 때 경험해본 바 있었다. 남겨진 동료들이 부담을 덜 느낄 수 있도록 업무를 재배치해 주거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같은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설명해주는 상사가 있어 참 고마웠다.

그렇기에 이런 어려움을 해소해주진 못할 망정 불법적 언행을 퍼붓는 남편의 상사를 당장이라도 신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남편의 복잡한 감정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무시하고 그냥 휴직 써버려!' 라고 쉽게 말 할순 없었다.


남편은 설득하고 싶어 했다.

자기가 왜 육아휴직을 원하는지,
다녀와서도 무리없이 복귀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
똑같은 직장인 아빠로서 그 상사에게 이해받고 싶어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성공한 것 같진 않았다.

남편은 결재 도장을 받기 위해 몇번을 본부장실에 찾아 갔다 (몇번은 그쪽에서 다시 생각해보라며 돌려보내기도 했다)

남편은 진정으로 '다녀와라'의 의미가 담긴 결재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는 본부장의 태도에 한 성깔 하는 남편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고 한다.



저는 애 크는것좀 볼랍니다.



나는 이말이 로맨틱하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했다.

이성으로 무장하고 사는 남편이 결국 마지막에 하고 나온 말이 상대를 설득하려는 하는 말이 아니라 감정으로 툭 던지고 나온 말이라는 게.



남자 육아휴직은 법으로 보장된 권리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게 아니라 아빠와 엄마가 함께 키우는 거다.

그런데도 2025년에 육아휴직을 쓰면서 눈치를 보고 승진을 미끼로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아야 하는 현실. 여기저기서 인구 절벽이니, 역대 최저 출산률이니 하며 정책을 쏟아내지만 막상 이 현실 안에서 보기에 참 우습다.

아직도 대부분의 회사에서 남자가 육아휴직을 쓴다는 건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하는 일'이라는 현실을 몸으로 겪었다. 우리가 경험한 게 아빠 육아휴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벽인지, 변화하지 못한 개인과의 갈등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유쾌하지 않은, 좀 찝찝한 시작을 해야 했다.


•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육아휴직) ① 사업주는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가 모성을 보호하거나 근로자가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입양한 자녀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를 양육하기 위하여 휴직(이하 “육아휴직”이라 한다)을 신청하는 경우에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0조(육아휴직의 적용 제외) 법 제19조제1항 단서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란 육아휴직을 시작하려는 날(이하 “휴직개시예정일”이라 한다)의 전날까지 해당 사업에서 계속 근로한 기간이 6개월 미만인 근로자가 신청한 경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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