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고픈
회사 동생들이 퇴근하고선 갈 데도 없다며 저녁 먹고 커피 마시자는데, 어쩌지. 뭐, 바쁠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그러지 뭐. 하고 따라나섰다. 나보다 두 살 그리고 한 살 아래인 동생들은 삼십 대이자 나와 같은 싱글이다. 싱글이면서 각자의 운동을 즐기는 공통점이 있는 우리들은 잘 뭉치는 편이다. 오늘저녁도 회사 근처에서 맴돌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해보자, 하고 고이고이 생각해 둔 거 뭐 있어? 버킷리스트라고 하면 너무 거대해 보이니. 그래, 미니 버킷리스트정도? 생각해둔거 있어?" 하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바로들 대답한다.
산을 사랑하고 체력도 좋은 한 동생은 히말라야로 떠나고 싶다 하고, 검도가 취미인 그래픽디자이너 동생은 컴퓨터가 아닌 캔버스에 맘껏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한다. 아! 그렇구나. 다들 생각해 둔 게 있었구나, 멋진데! 그런데... 나는? 정작 질문은 한 건 나인데 내 대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지?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생긴다 가정했을 때 가장 먼저 하고픈 게 뭐지? 뭐였더라.
프라이빗한 여행과 일로서 가는 출장은 다르지만, 해외출장이 워낙에 잦았던 시기라서 어딘가 멀리 떠나고픈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버킷리스트는 뭐가 있지. 많았던 것 같은데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빠른 대답을 해낸 동생들이 대단해보인다. 하고자 하는 게 있다는 것은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다는 말이지 않겠는가.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워진다.
그 날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초가을, 홍대부근에 집을 얻어 싱글라이프를 맘껏 즐기고 있는 후배집에 놀러를 간 적이 있었다. 하루를 꼬박 홍대분위기에 맞춰 놀았더랬다. 다음날 오전 진한 커피한잔 하러 나가는 길목에 바람 타고 은은하게, 그렇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흥겨운 우쿨렐레 화음이 종달새 못지않다. 귀가 쫑긋 열린다. 들려오는 방향찾아 고개를 돌리니, 카페 앞에 세명의 연주자가 모여있다. 알로하셔츠의 남자, 긴 생머리를 한 여자 그리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도 보인다. 리듬 맞춰 연주하며 흥얼거리는 노래소리가 말그대로 환상적이다. 그들의 조화로운, 평화로운 모습이 여름끝자락 바람타고 나에게도 스며든다.
우쿨렐레가 이렇게나 듣기 좋다니.
그때 난생처음 알았다.
그리고 곧 있을 일본출장을 준비하면서, 한가지 맘 먹기에 이르렀다. 2박 3일의 일정을 마무리한 후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시부야로 갔다. 사전에 체크해둔 악기상점에 들러서 나만의 우쿨렐레를 하나 사올 참이다.
현악기가 모여있는 곳에 도착. 우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악기상점은 정말이지 현실세상과 조금 달라보였다. 악기들의 천국이랄까, 완전 별천지다. 바이올린부터 첼로, 커다란 하프도 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신기해하며 둘러보다 친절한 주인아저씨 배려로 몇 가지 우쿨렐레를 추천받았다. 음색이 가장 마음에 든 것으로 고르고선 가격을 치르고, 까만 악기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음악인 그 자체다. 코드하나 모르는 상태지만, 이미 대만족이다.
이제는 그 다음단계 - 악기 배울 곳을 찾아야 한다. 홍대며 강남이며 신촌이며 여기저기 알아보았건만 시간과 여건이 만만찮다. 후우- 무턱대고 악기만 산건가, 싶었던 그때 회사앞 새로생긴 와플가게에 붙어있던 '우쿨렐레 그룹레슨' 전단지! 여기서? 레슨을?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장소에서, 배울 곳을 찾아냈지 말이다. 사무실에서 고작 5분 거리다. ‘진심을 다해, 정성을 다해 원하면, 찾으면 결국엔 찾아지는구나’ 하며 나의 신념이 되살아난 순간이였다.
내가 찾은 건지, 일본에까지 가서 악기를 사 온 내 정성에 보답을 해준 것인지. 글쎄 어쩌면, 레슨장소가 날 찾아낸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스스로에게- 더 집중하며 살자, 싶은 생각으로 후배들에게 물었던 질문이 결국은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한 결과로 이어졌다. 삼십 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가던 시기에 집중하며 배워본 이 악기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기회가 닿으면. 해보고자 하는 일이 있는지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여행이 되었건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골프나 여자축구, 또는 테니스 등 새로운 도전이 되는 운동도 좋다. 아니면 나만의 그 무엇이 되든 아무렴 좋다. 해보고자 생각해 둔 일은 언제, 어떤 일로 기회가 닿을지 모른다. 다만 생각이 생각만으로 뭉쳐져 공중분해 되지 않도록 나만의 다이어리나 수첩에 직접 적어두려 한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틈 나는 여유가 아주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주저 없이 시작하는 거다. 하고자 하는 게 있다는 것은 달리말해,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말로도 풀이가 된다.
혹여나 하고자 하는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귀를 열어두고 마음을 열어둔다면, 오늘에라도 길을 걷다가 불현듯 떠오를 수 있지 말이다.
추신.
네팔 히말라야를 가고자 했던 (늘 야근의 연속이던) 회사 동생은 드디어 장기휴가를 얻어냈고, 안나푸르나에서 인생최고의 기분을 느꼈다 한다.
검도 실력자인 디자이너 동생은 고양이집사가 되어, 유화를 비롯해 아크릴, 수채물감 등 갖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원하던 그림을 맘껏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