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코트 입은 여자
환절기가 다가온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오면 대다수의 여자들은 혼잣말을 시작한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네...' 사실 팩트만 놓고 보면 걸칠 옷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거참 요상하다. 이맘때만 되면 옷장에 있던 옷들이 사라진다. 일 년 전 뭘 입었는지 기억이 통째로 증발한다. 옷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작년에 뭘 입었는지 정말이지 도통 모르겠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가을이 가고 겨울도 온다
내 옷장엔 입을 옷이 또 없다
환절기만 되면 옷이 자꾸만 사라진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던 어느 날이었다. 형부가 허락했다며 생애 첫 밍크 모피를 살 예정이라는 언니. 모피를? 아줌마들 모피를? 같이 보러 가자고 한다.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백화점 4층,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 옷 입혀보랴, 저 옷 입혀보랴 매장 직원들이 무척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 움직임 따라 하하 호호 매장 안의 모두가 즐겁다. 한쪽에서 둘러보던 나에게도 한번 걸쳐보라며 윤기 날 리는 털옷을 꺼내주신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손사래 치는 중에 토끼인지 여우인지 내 손등을 스쳤고 그 순간의 촉감에 이끌려 '한번 입어볼게요' 말을 건네고 만다.
매니저까지 총출동되어 그럼요! 하시며 최대한 공손하고도 친절하게, 천천히 입혀주신다. 마치 공주님 여왕님 놀이를 하는 듯하다. 여긴 마치 여자 어른들의 소꿉장난 놀이터 같다. 베이지 컬러를 한 모피 한벌이 내 손을 꼭 잡고 왔다. 집까지 안전하게 잘도 따라왔다.
마치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던 백곰 한 마리 같았다.
계산대 앞에서 자연스레 카드를 꺼냈고 건넸고 긁혔다. 월급에 맞먹는 모피 옷 한 벌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자연스럽게 나도 살며시 산거다. 삼십일 죽어라 일하며 번 돈, 가볍게 한번 써봤다. 서른 하고도 중반이 되자마자 저지른 말 그대로 억제하지 못한 - 충동적인 구매다. 충동구매라는 것을 내가 하다니. 저질러버리고 나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두툼한 옷을 바라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영하의 온도가 되자마자 옷장에 고이 모셔둔 모피를 꺼냈고 툭 걸쳐보았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옷이 된 걸까. 무척 보드랍다. 집을 나서기 전 현관 앞 거울로 한번 더 날 바라보는데 이런. 갑작스레 어색함이 엄청난 폭풍우로 돌변해 후욱 휘몰아친다. 아닌 것 같다. 아직 이런 모피를 입을 땐 아닌 것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당장에 벗어 옷장 속으로 들여보냈다. 그래 아직 모피입을 만큼의 추위는 아니지 말이야 하고 오래된 까만 모직 코트를 입기로 한다.
다음날도 춥다. 영하다. 그런데 목도리를 둘러도 될만한 온도이다. 모피는 옷장에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그대로 두기로 한다. 이번 겨울 많이 춥다던데, 아직은 견딜만하다. 모피는 조금 더 추워지면 입어야지, 하고 옷장문을 가만 닫는다.
영하 10도. 오늘이 바로 그날 인가보다, 하며 백곰 모피를 꺼냈고 걸쳐보았다. 오늘은 입어도 되겠다 싶어 출근룩은 이 아이로 결정했다. 옷감이 너무 부드러워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큰 용기 내서 입고 밖으로 나왔다. 포근하고 따뜻하긴 하다. 그런데 왜 이리도 어색한지 모르겠다. 추워져 다행이다 하며 입고 나왔건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가 날 볼까 봐 괜한 부끄러움에 최대한 앞만 보고 걸었다.
출근시간. 직원들이 두 줄로 서있는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텐션 높은 회사 여직원을 만났다. 제발 휴대폰만 봐라, 아는 척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감독님 큐 사인이 떨어진 것 마냥. 어머나! 과장님! 우와 옷 새로 사셨어요? 우와. 이거 혹시 진짜 모피예요? 대박대박. 이뻐요! 만져봐도 돼요? 우와. 부드럽다. 진짜 부드럽네요! 이런 옷은 얼마나 해요? 우와.
.... (얼굴이 달아오른다. 뜨겁다. 내 얼굴이 붉어진다)
내 돈 내고, (매장 직원들의 립서비스도 엄청났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하고 결제한 내 옷이건만. 그 옷을 주인인 내가 입었고, 그저 걸치고 회사에 온 것뿐이겠만 이 부끄러움 어쩌란 말인가. 모피 입고 괜스레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사람, 나 말고 어디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날 이후, 한동안 멀리했던 모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선 다시 한파가 온다 하면 서너 번 꺼내 입을 정도로 아주 가끔만 입었던 내 럭셔리 겨울옷 모피. 한번 입을 때 열두 번 고민하며 미안할 정도로 어색해하며 입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하면, 사실 뭐 그렇게까지 유난스럽게 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이가 좀 들었다 생각한 삼십 대 중반의 과장님이던 그때는 명품 브랜드 가방처럼 모피도 하나쯤 사야 하는 줄 알았다. 서른 중반에는 모피도 입고, 비통 가방에 구찌 지갑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줄 알았다. 폭스바겐 골프나 미니쿠퍼를 타야 하는 줄 알았다.
삼십 대가 되면 소비하고 소비한 티는 내줘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몰랐다. 차곡차곡 돈을 모은다는 개념이 없었다. 청약통장의 필요성을 몰랐고, 재테크에 대한 지식도 없었으며 주식을 하면 집안이 폭삭 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저 다달이 얼마의 적금과 적립식 펀드연금 하나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돈의 개념을 그렇게만 알았다. 아직도 돈이 란 건 다가서기 어렵지만 삼십 대 시절엔 돈의 속성 자체를 참 몰랐다 싶다.
회사퇴직을 염려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매월 들어오는 월급은 그저 당연하다 생각했다. 어디를 갈까, 무엇에 쓸까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모은다는 개념이 취약했던 듯하다. 결혼이라는 것과도 무관했기에 더욱이 그러했다.
이십 대는 학점높이고 취직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취직은 또 쉬우랴. 힐을 즐겨 신지 않았던 탓에 면접 본다며 돌아다닐 적 발등이 무척이나 쓰라렸었다. 어린 줄 모르던 이십 대의 젊음이 지나고 나니 삼십대다. 삼십 대에 들어서니 이제야 어른이 된 듯했다. 갑작스러운 어른의 시선으로 물건을 구매하다 보니 자꾸만 브랜드에 눈이 갔고 주변에서의 반응도 한몫했던 듯하다. 진짜 어른이 뭔지도 모른 채 꾸미고 입히는 공주놀이에 심취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에코백처럼 가벼운 가방을 선호한다. 명품이라 일컫는 남은 몇 개의 가방들은 옷장 한 구석에 쌓여있을 뿐이다. 일 년에 서너 번 바깥구경을 나오기도 하지만 360여 일은 같은 자리에서 옹기종기 머물 뿐이다. 나의 한 달 월급을 통째로 흡수한 부드럽기 그지없는 모피와 함께.
가만 생각해 본다. 모피를 사러 갔던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 하면 어찌할 것인지. 그래도 살 건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 사용을 할 것인지. 잠시 시간을 멈추고 그때 그 시절로 가본다. 우선 코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가정하에 10년이 지나도 변함없고 자주입을 수 있는 질 좋은 캐시미어 코트를 한벌 살 듯하다. 그리고 남은 돈은 일단 통장에 넣어두지 싶다. 그다음으로, 튼튼한 책장을 하나 사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책장을 메워가는 나날들을 즐기고픈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꼭 그렇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