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위에 나열 된 시간들

노트와 펜은 곁에 둡니다

by 김혜진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가장 먼저 하던 일이 있었다. 스케치북을 가득 메꿀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점을 꾸욱 찍었다. 생각을 잠시 한 뒤, 아침 기상시간을 정하고 오후 놀거리를 떠올려본 뒤 저녁 취침까지 구상이 되면 주저함 없이 손에 잔뜩 힘을 실어 할 일들을 적었다. 방학 동안의 어린 나를 책임질 일일계획표다. 야심 차게 만들고선 책상 앞 벽에 붙여두었다. 지키든 못 지키든 무언가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즐거웠던 시절이다.








스물한두 살 즘에도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이번에는 동그라미 원이 아닌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쭈욱 가로선을 막힘없이 그었다. 이십사 시간 하루 계획이 아닌 10년간의 장기플랜을 세우기 위해서다.




새하얀 연습장 위에 반듯하게 그어둔 선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 줄 위에서 나의 미래가 펼쳐진다는 긴장감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앞날에 대한 막연함 때문이었을까. 시간을 조금 더 흘려보내고 손에 쥔 볼펜을 바로잡았다. 지금의 내 나이부터 적어본다. 1년 후 내 모습을 적고, 2년 후의 할 일을 적었다. 3년 후 있을 곳을 적어보고 그런 다음 5년 후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봤다. 7년 후까지 오니 어느새 서른에 다다르고 있다. 마지막 10년 후의 모습까지 모두 적으니 삼십대다. 내가 서른이 된다고? 피식 옅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노트 위 기다란 줄 따라
십 년이 훌쩍 지나갔다






스무 살 시절 연습장 위 한 줄 계획은 2-3년 정도 뒤쳐졌으나 한 가지를 제외하곤 모두 결국엔 이루어냈다 (그 한 가지도 삼십 대 후반에는 마침내 클리어해냈다). 거참 신기하고도 신비로운 계획표다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 연습장은 뭐든 다 이뤄주는 마법이 걸려있었나 싶기도 했다.








이십 대 후반 일본 도쿄에서의 출근길 아침.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공기도 맑고 날씨도 기가 막히게 깨끗하다 싶었다. 전철을 탔고 회사가 있는 고탄다역까지는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했다. 신주쿠 옆 다카다노바바역에서 JR 야마노테로 갈아타려 계단을 오르던 중 불현듯 걸음이 점점 느려짐을 느꼈다. 느려진 걸음은 결국 멈춰 섰고 오고 가는 사람은 많은데 주위가 잠시 조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눈앞에 보이는 카페에 이끌리듯 들어갔다. 일찍이 나왔기에 출근시간 까지는 아직 여유롭다. 커피를 주문하고 멍하니 전철역을 오가는 인파를 바라봤다. 하나같이 빠른 걸음이다. 박수 한 번에 모두가 멈출 것만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휴대폰을 꺼냈고 직속상사에게 약속이나 한 듯 전화를 걸었다. 오늘 출근이 좀 힘들 거 같다고, 몸이 안 좋아 하루 쉬고 내일 뵙겠다고. 쿨하디 쿨한 선배는 알겠어 푹 쉬어. 대답한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다이어리를 꺼냈다. 빈 페이지를 펼치고 줄 하나를 그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주욱 끝까지. 스무 살 시절 연습장 위에 그었던 그 느낌을 최대한 떠올리며 쭈욱 옆으로 선을 그어봤다.




1년, 2년, 3년.... 이번에는 10년 후를 지나 20년 30년 40년까지 표시를 해본다. 지금의 연도를 적고, 그 아래에 자그마한 글씨로 스물여덟 내 나이도 적어본다.








스무 살 시절 앞으로의 십 년을 적었던 종이 한 장으로 역삼동에서 여기 동경에까지 왔다. 맨땅에 헤딩하듯 많은 일들을 겪었으나, 야마노테 중심부에 위치한 회사를 다니면서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도 얻었다. 회사에서는 마음 통하는 절친 베프 아코도 만났고, 유도가 취미인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부터 옆자리뒷자리 동료들까지 모두가 친절했으며 사람신경 안 쓰며 하는 일에만 최우선을 둘 수 있어 말 그대로 불만제로인 환경이었다.




모든 게 평온한 상태건만, 출근길에 멈춰 섰다. 왜 그날 갑자기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서른 즈음이 되던 시기라서 그랬나 싶다. 곧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시간이 지나갈 터인데 그 이후의 그려진 그림이, 계획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흠칫 놀랬던 것이 아닐까 한다. 나 이래도 되나, 하고 생각을 했지 싶다.




전철역이 다시 움직인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나는 지금 카페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멈춰진 시선이 줄이 그어진 수첩의 빈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다. 펜을 쥔 손을 기다란 선 위로 가져갔고 적기 시작한다.




30 - 한국에 돌아간다

31 - 세 달간 쉬고 취직한다

35 - 결혼을 한다

40 - 영미권으로 이사한다

45 - 작가가 된다

50 - 그림을 그린다

55 - 재단을 설립한다

60 70 80 90.... (죽는 날까지 상상했다)




햇수로 5년 단위이기는 하나 그날 수첩에는 조금 더 상세하게 적었다. 그리고선 다시 전철을 탔고 갈 곳도 없고 해서 곧장 회사로 출근을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싶게 새롭게 맡은 무민의 일본공식홈페이지 제작에 돌입했다. 핀란드에서 온 사랑스러운 무민가족 이미지를 보면서 다시 해야 할 일에만 몰입했다.








지금 나이가 몇 이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든. 어쨌든, 계획이라는 것 한번 세워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목표로 하는 것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도전할 무언가가 있다 하면 박수받을 자격도 있다고 본다.




노트와 펜은 언제든 곁에 두자.




펼친 노트에 줄을 긋고 볼펜은 손에 잡으면 된다. 2023년도인 지금의 연도를 왼쪽 끝에 적자. 그리고 그다음은 자유다. 마음도 행동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자유다. 춤을 추고 싶으면 추어도 좋고, 날고 싶으면 날면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계획은 그렇게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계획을 세울 때는 최대한 장기플랜을 세울 것을 추천한다. 단기 계획은 성공 이후에 오는 허한 공황상태 그리고 우울한 기분에 빠질 위험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중간에 바뀐다 한들, 인생계획은 크게 그리고 최대한 길게 세워야 만한다.




이십 대이든 삼십 대이든, 이십 대 후반이든 삼십 대 후반이든 아니 사십 대이든 간에 그 나이가 뭐 중하랴. 선 긋기 하나쯤 못하겠는가. 긋고 생각해 보는 거다. 나에게 집중하고 어릴 적 꿈도 떠올려 보고, 학창 시절 부러웠던 친구도 생각해 보고 항상 하고 싶었던 또 배우고 싶었던 것들도 모두 아득한 기억 속에서 힘껏 끌어올려보자. 그리고, 노트한 장 펜하나만 준비하면 된다.




이십 대 후반에 세웠던 인생 계획은 서서히 이뤄나가고 있다. 이삼 년 혹은 그 이상 뒤로 미뤄진 것도 있으나 하나 둘 해내가고 있는 중이다. 서른다섯에 하리라 생각한 결혼도 예상보단 한참 늦어졌으나 서른 후반 즈음엔 하게 되었고, 바라던 대로 미국에서 열 달이 넘게 살아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사십 대인 지금은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저 종이 한 장에 줄하나 긋고 써본 나의 미래가 하나둘 선명한 색을 띄어가고 있음에 스스로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추신.

스무 살 시절 세운 인생계획은 이랬다.


스물둘 일본어 혹은 영어공부를 시작한다 - 일본어를 선택했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종로에 있는 시사어학원을 2년여 다녔다. 그냥 했다.


스물넷 해외유학을 간다 - 연고도 없고 아는 이도 하나 없건만 떠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십 대 중반 캐리어하나와 가방하나 메고선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스물여섯 외국회사에 취직한다 - 학생비자 만료되기 직전에 일본회사 두 군데에서 취직통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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