쌉싸름이 더해진 고소한 커피 향이 혀에 닿기도 전에 코 끝에 머뭅니다. 에티오피아 산 중턱에서 불어온 건지, 브라질 초원에서 날아온 건지 여기 이곳, 별다방까지 그 진한 향이 다다랐지 말입니다. 환영의 마음으로 한 모금, 상상 속 미지의 장소에 쏟아졌을 그 강렬한 태양빛을 생각하며 또 한 모금, 꿀꺽. 마셔봅니다.
백수인 지금, 카페 이층의 인테리어를 책임지고 있는 커다란 통창 앞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지나는 행인들 그중에서도 사원증 스트랩을 목에 건 직장인들이 유독 눈에 띕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이토록 가득이건만 홀로 노는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십칠 년 직장생활 내내 하루 두세 잔씩 마시던 커피만이, 일을 그만둔 지금도 여전히 떠날 줄 모르며 곁을 지킵니다. 머그잔 속 뜨겁고도 진한 아메리카노. 블랙으로 오인받는 브라운 커피의 피어오르는 향이 날아갈까 봐 또 한 모금 홀짝여봅니다.
카페 이층 공간. 뒤를 돌아보니 홀로 온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테이블을 지키며 최대치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네요. 두터운 책과 노트북을 펼쳐두고 공부하는 학생들, 에어팟을 끼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
의미 없는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격자무늬 노트를 펼쳤습니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무엇이 하고 싶은가. 쇼핑할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듯 한 칸에 하나씩 써 봅니다. 배우고 싶은 것도 적어보고, 오랜만에 만나고 싶은 친구이름도 적어보고 가고 싶은 곳도 몇 군데 떠올려봤습니다. 지금 당장에 해 볼 수 있는 것에는 별표를 그려 넣다 보니 세 군데에 반짝이는 별이 붙었습니다.
커뮤니티 모임 만들어보기 : 영어스터디
악기 하나 배워보기 : 우쿨렐레
가능한 운동 하나 시작해 보기 : 임산부 요가
임신 초기이기는 하나, 이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해 보입니다. 하고픈 할 일들을 자그마한 공책 위에 글로서 적고 펼쳐보니, 텐션 차오르듯 자가 에너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근심해서 근심이 사라지지 않듯이 생각만으로는 생각을 잡지 못하고 어느 무엇하나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빠르게 검색하였고, 두 곳 모두 순조롭게 찾아졌습니다.
원하는 것을 알아채니 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납니다.
뒤이어 커뮤니티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배움의 시간을 이어가고자 스터디그룹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학습 주제와 멤버 모집글을 인터넷에 올려두었으니 뜻이 맞는 이들 서너 명이 모여지면 언제라도 시작이지 말입니다.
이것으로, 약 10개월간의 임신 기간 스케줄이 어느 정도 정해졌습니다. 계획한 대로 흘러갈지 변수가 있을지는 해보면 알 것이기에 걱정 없이 즐겁게 시작하면 될 듯하네요.
생각정리에 도움 주던 아메리카노는 아쉽지만 이제부터 당분간 헤어질 결심을 해 보렵니다. 임신 중에도 한두 잔 마시는 건 그리 해롭지 않다며, 마시지 못함에 스트레스받느니 마시며 해소하세요,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친절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줄일 생각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고는 염려라지만, 근심해서 근심이 사라지면 근심할 일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근심, 몸은 여기에 있는데 정신은 어딘가에 가 있다는 건데요. 몸이 있는 곳에 생각이 있도록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행동이다, 싶습니다.
임신했다 하여 가만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수라 하여 조용히 지내고 싶지도 않고요. 시간의 여유가 심심함이 되지 않도록 움직이려 합니다. 새로운 경험들은 뱃속 아기에게도 분명히 도움 되리라 여겨지기에 시작도 전에 흥분이 되나 봅니다. 산미 나는 커피 한잔에 10월 말까지의 계획은 즐거이 완료되었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