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보단 결혼
알라딘에 가고,
자전거를 타고,
복잡한 거리든 인적 드문 거리든 같이 걷는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신다.
테니스를 하고,
드라이브를 하고,
공원을 산책한다.
친구들을 만나고,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고,
맥주도 마신다.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고,
오고 가는 대화를 나눈다.
우리들의 일상은 소소하리만치 평온하다. 단순하게 나열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삼십 대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 찾아온 이토록 평화로운 일상이 나를 점점 변화시켜 가기 시작했다.
회사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을 때면 혼자서 끙끙거리곤 한다. 친한 이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저 잠시 잠깐 벗어날 뿐 온전히 해결이 되지는 않는다. 참고 견디며 그저 답답함만 커져갈 뿐이다.
서서히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한 어느 날, 오늘 있었던 상사에게 핀잔받은 회사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며 스트레스 쌓인다는 얘길 하는데. 그렇게 혼자 이야기하길 5분? 아니 10분쯤 되었을까.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친구가 별다른 호응이 없다. 고개만 잠시 끄덕할 뿐 그저 두 눈 초롱초롱하며 날 바라보고 있다.
호응이 없으니 화가 날 법도 한데. 어라. 화가 나기는커녕 요동치던 신경들이 빠르게 정리 정돈되듯 잔잔해진다. 이건 또 무슨 경우지 싶다.
이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친구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말한다.
그만둬버려.
'그만둬버려.' 라니. 거참 짧고 굵은 말이지 않을 수 없다.
그만두라니. 무슨 그런... 아니 잠깐. 이상하다. 갑자기 속이 시원하다 못해, 점점 더 뻥 뚫리는 느낌이다. 아빠나 엄마도, 내 옆 친구들도,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던 한마디다.
분명 친숙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어본 적 없는 그만두라는, 그 말의 파장이 크다 못해 이내 분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웃음이 나왔다. 웃었다. 내가 웃었고, 초롱 눈빛 남자도 웃는다. 둘 다, 가만 웃고 있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이럴 수도 있다고? 뭐라 토닥토닥 위로를 건넨 것도 아니고, 같이 욕을 해준 것도 아니고 그저 그만두라고 딱 네 글자 - 한마디 했는데, 이런다고? 그런데 그랬다. 그렇게 되었다.
회사 이야기는 누군가의 험담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끝났고, 우린 다시 밥을 먹었다. 그것도 맛있게 먹었고, 어느샌가 바뀐 화제에 집중하며 티키타카 오가는 대화를 하고 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중고서점에 들어갔고 서로 보고픈 책을 둘러본다. 남자친구는 만화책 코너에 있고 난 소설 코너에 머문다. 한가롭고 여유롭고, 자유롭다.
밖으로 나와서는, 할 일 없는 늑대와 여우처럼 길을 걷는다. 둘 다 사냥이 필요치 않기에 한 발 앞선 남자의 보폭에 맞춰 이끌려 따라가듯 걷고 있다. 내민 손을 잡고 걷기가 팔짱이 끼고 싶어졌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잡던 손을 빼고 옆에 꼭 붙어 팔짱을 꼈다. 얼굴을 들어 남자친구를 바라봤다.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남자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근데. 나 진짜 그만두면 어쩌려고, 그만두라고 말했어?"
"그만둘 거 아니잖아."
"어 맞아. 그만 안 두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돼. 편하게 해."
"나 먹여 살리는 거야?"
"당연하지."
살아생전에, 내 나이 서른 하고도 여덟이나 된 지금. 나를 먹여 살린다며, 그저 말로만 이더라도 그렇게 말해 준 이가 과연 있었던가.
조울증 아냐 싶을 정도로 한껏 텐션 올라 기분이 좋았다가도, 우물가 개구리처럼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크게 상처받고 몇 날 며칠을 우울해하는 나다. 그 어느 누가 보아도 강하고 당당하고 뭐든 해 낼 것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혼자일 땐 외롭고 맘 아파하며 울기도 잘하는 나다.
나이가 들어가면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맘을 가질 줄 알았다. 다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안다. 그래서 이제 더는 강한 척은 하지 않으려 한다.
무거운 짐이 있으면 무겁다 말하고,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을 받기로 하고, 힘들면 힘들다 말하고, 못하겠으면 못한다고 말하려 한다. 내 남자 앞에서 더 이상의 프리텐딩은 필요치 않다. 이 남자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된다.
센 척하지 않는 나. 내가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어간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들어준 이 남자. 이 귀여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유심히 살펴보자. 어쩌면 그 사람이 나의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아차차. 나 또 미리 김칫국 마시는 건가? 어느새 이 남자와 결혼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있다. 상상이라는 게 뭐 나쁘겠느냐마는, 너무 지나친 건 브레이크를 걸 필요도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그저 걱정스럽게만 보는 것도 그렇고. 그 반대로 너무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것도 위험하다. 다만, 미래를 그려보고 생각하며 현실로 가져오는 것은 훌륭하다고 본다.
남자친구와 일상을 함께 공유하다 보니, 어느새 함께 살게 될 언젠가의 미래를 하나 둘 생각해 보게 된다. 나 혼자만의 즐거운 상상인 셈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하리다, 저러하리다의 장면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확실한 느낌이 한 가지 있다.
잘 살 것 같다,라는 확신이 든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고, 매우 단순하기도 한 말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그럴 것 같다. 아직 결혼이라는 말이 오가거나, 준비 단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즉흥적인 나는 또 물었다.
"혹시 우리가 같이 산다면 말이야. 어떨 거 같아? 결혼하면 많이들 다툰다 하잖아. 우린 어떨 거 같아?"
"어떨 거 같은데?"
"잘 지낼 거 같아. 엄청."
"당연하지."
"그럼 우리 결혼해도 되겠다. 빠른가."
우리의 가을이 다가왔고, 나의 결혼도 성큼성큼 다가옴을 직감적으로 느껴본다. 아직은 넘어야 할 산도 많고, 갈 길도 많은 우리지만 함께 하고픈 마음이 갈수록 커짐은 확실하다.
언제나의 나처럼, 하고프면 하는 것. 결혼하고프면 하면 되는 것이란 걸 이미 알기에 이제 더 이상의 조급함은 없지 싶다. 그냥, 하고플 때. 이제 때가 되었다 느낄 때.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내 삼십 대 마지막의 찬란한 연애를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지금 당장은 적어도 올해의 서른여덟이 끝나는 시점까지는 맘껏 연애를 하리라.
한강에서 바람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밥을 먹고 한량처럼 거리를 거닐며,
사지도 않는 책을 보러 서점을 기웃거리고,
시시콜콜한 오늘 하루 이야기를 하면서.
지난주와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서 나의 두근두근 연애를 이어가련다. 그건 그렇고,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쓰담쓰담해주는데 왜 이렇게 여자 맘은 콩닥콩닥 뛰는 걸까. 난 열여덟도 아닌 서른여덟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