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 마법사를 만났습니다
생일이다. 서른여덟 번째로 맞이하는 생일이다. 축하를 받아야 하나 조용히 지나가야 하나 싶은, 내 생일이다.
퇴근 후 역 앞에서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고, 오는 길 러시아워에 걸려 차가 좀 밀렸지만 안전히 건대입구역에 도착했다. 단골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해 두고선 약속장소로 향해가는데 큰 키 때문인지,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보인다. 서로를 발견하곤 한 명은 팔을 번쩍 들어 손을 흔들고, 또 다른 한 명은 어서 와, 하며 미소로 답한다.
평소에 만나던 곳이 아닌 콕 집어 전철역 앞에서 만나자고 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궁금한 건 물으면 된다. 계단을 올라가며, 왜 여기서 보자고 한거야? 어디 맛집 생겼어? 무슨 가겐데? 종알종알 쉼 없이 묻는데 멈춤. 갑자기 멈춰 선다. 따라 멈춘 나.
여기 비밀번호 풀어봐.
전철역 사물함 스크린 앞에서, 불쑥 비밀번호를 풀어보라니. 그 말은 다시 말해, 그 사물함안에 뭔가 있다는 거군. 오호라, 이 남자 이벤트를 준비했네! 머쓱해진다. 지나는 그 누구 한 명 신경도 쓰지 않건만,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비밀번호라... 내 생일인가? 띠띠띠띠. 안 열린다. 다시 한 번 더 이번엔 대외생일 날짜인 오늘의 양력생일을 눌러본다. 달칵, 소리를 내며 사물함 문이 빼꼼 열렸다.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자그마한 쇼핑백과 꽃이다.
뭐야 뭐야, 꽃도 있네! 하며 배시시 웃으며 좋아하면서, 쇼핑백을 보니 주얼리 브랜드다. 세상 태어나 남자사람에게 처음 받아보는 보석이지 않은가. 진심 놀라서 우와. 우와. 우와, 삼세번을 하고서야 여기서 풀어봐도 돼? 하고 물었다. 물어보나 마나 열거면서 말이다.
바로 오픈. 상자를 여니 여리여리한 목걸이가 수줍은 듯 들어있다. 나 할래! 그 자리에서 걸어달라고 했고, 그걸 또 받아주는 남자.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곳은 누가 뭐래도 나를 위한 생일파티 연회장이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플래시몹을 출 것만 같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즐거운 상상 만끽하며, 새로운 목걸이가 목에 채워지길 기다리는데 두근두근 떨림까지 더해진다.
밥 먹으러 갈까? 하며, 손을 잡고선 전철역을 빠져나오는 우리. 무르익은 가을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하다. 오늘 저녁 날씨마저 내 선물 같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서 기쁜 건지. 서른여덟 생일을 기적 같은 남자와 함께 해서인지. 손에 쥔 꽃다발 때문인지. 이 모든 것들이 감사히 여겨진다.
도쿄에 살던 이십 대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혹은 전철을 탔는데 맞은편에 이제껏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이 있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난 어떻게 할까. 하고 말이다. 그 상황을 위해 멘트라도 준비를 해 둬야 하는 건 아닌가, 편지라도 써둬야 하는 건 아닌가 하면서 몇 날 며칠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람을 톱니바퀴라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걸맞은 톱니를 찾아야 한다. 톱니가 서로 맞물려야만 회전력을 전달하며 돌아가는 것 아닐까 했다. 살다 보면, 나에게 맞는. 너무나도 딱 맞는 백 퍼센트의 톱니를 언젠간 만나겠지 했다. 그리고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항상 상상해보곤 했다.
오늘저녁, 난 그 톱니를 찾았다. 상상만 해왔던 그 느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도쿄시내 한복판 전철에 앉아 나의 톱니바퀴를 생각하던 때로부터 십 년 하고도 서너 해가 지나고서야, 내 나라 서울에서 드디어 찾았다.
내가 찾은 건지 이 사람이 날 찾아낸 건지 그 답을 낼 수는 없지만, 결국 우린 만나게 되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를 차분히 만들어주는 마법사이자, 무엇이 되었건 응원해 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듬직하기 그지없는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이기도 하다.
태어나길 정말이지 잘했다고, 당당히 말하고픈 서른여덟 번째 생일인 오늘의 난 생각한다. 흡사 마법에 걸린듯한 이 황홀한 느낌과 이 순간의 기억들이 평생 기억될 것 만 같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