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어서 서툽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개팅을 기다리거나, 썸을 탄다거나, 밀당을 하거나 혹은 고백을 받거나 하거나에 대해 이제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그런 지금이 몹시도 편안하다.
거리마다 있는 카페 어디에나 남녀 커플들이 마주 앉아있다. 그중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앉아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커플이 있다면, 분명 긴장 가득한 소개팅이지 말이다. 예쁘게 단장한 여자 앞에 오늘따라 더욱이나 말끔한 차림의 한 남자가 있고, 얼음만 남아있는 아이스커피가 놓여있다.
여자는 웃고, 남자도 웃는다. 남자가 끄덕이고, 여자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활발한 여자분과 차분한 남자분이 만났나 보다. 창가에 앉은 그 둘의 모습이 계속해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주선한 것도 아니건만, 괜한 흐뭇함에 이내 설레기까지 한다.
커피향만 맡았을 뿐인데 커피 맛이 좋음을 단번에 알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다. 다만 살다 보면 그와 정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저 커피향만 맡았을 뿐인데 탄 맛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른넷, 다섯 즈음에 였을까. 여느 때와 같이 회사일이 나의 사명인 것 마냥 야근에 야근을 더하며 일을 하던 시절, 유독 친절한 남자 동료가 있었다. 이름조차 기억이 가물 해진 이 남자는 개발부서의 그래픽디자이너였고 나보다 네 살쯤 어렸다. 사내 동호회를 계기로 여럿이서 어울리며 친해졌고 그중 한 명이었다. 무거운 짐을 들 때면 제가 할게요! 저 주세요! 한다거나, 무슨 말을 해도 허허. 허허. 사람 좋게 웃으며 즉각 호응이 나온다.
다니던 회사가 강남에서 구로까지 이사를 간다 한다. 회사일에 진심인 나도 회사 따라 이사를 결심했다. 홀로살이 독립을 하는 날. 네 살 연하의 이래도 허. 저래도 허 잘 웃던 어린 동료가 짐 나르는 걸 도와주겠다 한다. 같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던 동료 두세 명이 와서 이사를 도와줬고, 한국에서의 첫 독립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이사 후엔 꿀맛인 짜장면도 먹었더랬다. 물론 연하 디자이너님도 함께.
자주 어울리던 여자 동료들과 겨울산 등반 계획을 짜던 중, 남자도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싶어 '같이 갈래요?' 물으니, 가겠다 한다. 태백산 눈꽃은 본 적 없어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한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산에도 가고, 여름이면 계곡도 가고 서핑보드도 타러 가곤 했다.
그 후로도, 계속 어울려 다니길 몇 번 더... 안되겠다, 싶어졌다. 내가 먼저 말해주자, 싶었다. 용기라면, 새로운 무언가를 추진함에 있어 빠지면 섭섭한 나였기에, 생각난 김에 앞장서기로 했다. 예의 연하남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잠시 사내 카페는 좀 그렇고. 8층 카페에서 얘기 좀 나눕자, 했다.
먼저 가서 커피를 주문해놓고 기다렸다. 자주 마시는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차가운 커피도 한 잔. 테이블에 놓고선 기다리길 일이 분이나 되었을까, 왔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무슨 일 있으세요? 하며 묻는다.
아냐아냐. 커피 먼저 마셔. 하며, 앉으라 권했다. 잠시 잠깐 시시콜콜 얘기가 오갔고,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맘 다잡고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할게. 괜찮지?"
"네? 네에. 말씀하세요. 근데 좀 무섭네요. 허허."
"무섭긴. 있지 말이야."
".... 네. 말씀하세요."
"혹시 말이야. 나한테 마음이 있다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다면, 어려워 말고 말해도 괜찮아."
".....! 네? 저요?" 놀랜 얼굴이 역력해진다.
"어. 괜찮아. 그러니깐 뭐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이삼일은 생각 더 해보고 나서 대답하는 게 어때?"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저는 과장님을, 허허... 하하.. 허허..."
"하하. 그치? 나도 좀 웃기긴 하다. 여하튼 좀 있다 여기서 회의도 있고 하니,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낼이든 모래든 다시 함 보자고. 어때?"
"아. 아, 네에. 그럼 그렇게 하시죠. 허허.. 하하.."
"어어. 먼저 내려가. 난 여기서 회의.."
멋쩍을 줄이야 나도 알았으나,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에 나까지 당황스럽다. 마시지도 않은 커피를 이제야 한 모금 마셔볼까 하는데, 코 끝에 멈춘 향이 쓰다. 사장님이 커피콩을 태우셨나, 쓴 커피향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 이게 아닌가!!! 알고 보니, 나한테 맘이 전혀 없는 거 아닌가..... 그저 친절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을 뿐이었는데. 헛다리 짚음이다. 완전한 오해다, 싶다. 선명한 레드썬 상황이다. 꿈인가 생신가싶어져 헛웃음도 나질 않는다. 이것 참, 큰. 일. 이. 다.
십분 후 같은 장소에서 카페 회의가 있었으나, 뭐하나 들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나의 하루가 지났고, 이틀이 지났고, 삼 일째가 되던 날. 제발 제발 날 모른척해 줘 싶었건만, 진동으로 해둔 전화기가 심히도 울린다. 퇴근하고 밖에서 보자 한다. 어쩌겠나, 나가야지. 회사 친한 동생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말했더니 뭐 하면 같이 가줘? 한다.
어, 하고 대답하는 나. 그래도 이야기 마무리는 둘이서 지으라며,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한다. 후우-후우-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만나자 한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장소에 가니 먼저 앉아있는 에 띤 얼굴의 한 남자가 '여기요!' 손을 든다. 뭘 그렇게까지 싶어 냉큼 걸어갔다. 뭘 주문할지 몰라 그냥 같은 걸 주문했다 한다. 얼음 동동 아이스커피다. 난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데...
"과장님, 생각해 봤는데요."
"어? 아.. 어. 생각했어? 근데 있잖아, 나도 생각을 했거든? 아닐 수도 있겠더라고."
"허허. 허허." 이런. 또 웃기 시작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 말 그냥 없던 걸로 할래? 뭐가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 생각 해서 말씀 주신 거라 저도 생각을 더 해봤어요. 그랬는데요."
"어어, 그랬구나.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해 말을 자르는 나다.
"죄송해요. 저는 맘이 없어서요. 허허.. 허허..."
"어. 어. 그럼, 그럴 수 있지. 하하.. 하하.. 나도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닌 거 같더라. 잘 됐다. 같은 맘이라. 하하.."
"허허.. 네에. 허허..."
이 무슨 괴변이고 황당무계한 말도 아니 되는 시추에이션이람. 그저 누구에게나 과잉 친절한 남자일 뿐이었는데. 설마 날 좋아해서? 날 맘에 두고 있어서? 아이참, 내가 좋다고?라며 넘겨 집기의 최고점을 찍고 말았네요. 사람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습니다, 대단하지 말입니다. 그 대단한 사람이 나란 게 믿기지 않을 뿐.
날 기다려주고 있던 회사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가고 있다고. 별말 없이 얼른 오라, 한다. 만나자마자 맥주잔을 세차게 부딪히고선 시원하게 들이켰다. 역시 아사히다. 목 넘김이 기가 막힌다. 됐다, 싶다. 창피함의 끝은 여기까지면 됐다.
같이 자리해 준 동생도 웃고 나도 웃고, 맥주 거품도 웃는 것만 같은 오늘 저녁이다.
그렇게 나의 사내연애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고백이란 것을 처음으로 해본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상사에게 희안스러운 고백을 받았던 불쌍한 연하남씨는 그 뒤로 안 하던 소개팅을 했다 한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똑닮은 여자를 만났고, 사귀게 되었고 나중 나중 이야기에 의하면 결혼까지 했다고.
가만. 나로 인해 적잖이 충격을 받고선 급 소개팅을 한건 아닐까? 그런 후 뜻밖의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분을 만난 건가? 평생의 동반자를 나로 인해, 내가 만나게 해준 거 아닌가? 내 덕인거였어? 다시 또 올해의 넘겨 집기 우승을 하려는지, 내 안의 상상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만, 그만. 여기에서 스톱합시다, 하며 붙잡고 있던 생각들을 내려놓고 진정해 본다.
아직 식지 않은 커피 한 모금 더 마셔본다. 달콤한 향도 느껴진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나. 눈앞에 보이던 꽁냥꽁냥 소개팅 커플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까지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성큼성큼 내 쪽으로 주저 않고 다가오더니 앞자리에 앉는다. 그러더니 내 커피를 가져다 제 것인 양 마신다.
"음- 맛있다. 이거 무슨 커피야? 향 좋다."
나의 네 살 아닌, 일곱 살 연하 애인이다. 나보고 예쁘다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커피향 이야기만을 한 것임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오늘도 난 허허인지 하하인지 모르겠는 웃음소리를 낸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지 않아도 됨이 기쁘고, 썸 따위 타지 않아도 되고 밀당은 존재치도 않는 현재다. 그저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웃으면 되는 지금이 너무 좋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 중 누가 먼저 고백을 했더라? 난가? 이 남잔가? 고개가 갸웃갸웃, 한다. 생각해 보니 둘 다 특별한 고백도, 오늘부터 사귀자,라는 말도 없었지 싶다. 쌀쌀함이 감도는 날씨였던 어느 날 손을 잡았고, 그냥 그대로 걸었고 걷다 보니, 그냥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서툰 고백 탓에 더 이상의 서두름은 없어졌고, 이보다 더 편안할 수는 없다 싶은 연애가 이어지고 있다. 그저 처음이 서툴 뿐. 누군가 마음 가는 사람이 있다면 고백이란 것, 눈 딱 감고 해 봅시다! 누가 아나요? 그다음엔 정말이지 진짜 내 남자가 짜잔 하고, 나타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