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일치
나는 내가 외국인 며느리가 될 줄 알았다. 파란 눈의 남편을 맞이할 거라 생각했다. 잘 깎인 잔디로 뒤덮인 앞마당, 레몬나무가 탐스럽게 열려있는 뒷마당이 있는 곳에 살 거라고 늘 꿈꿨다. 여름이면 호숫가에서 수영도 하고, 보트도 타고 피크닉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리라 상상했다.
타고 있는 차 안의 온도가 내리쬐는 태양빛으로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선탠이 약해서인가 에어컨이 약해서인가 조금 덥다. 나는 지금 남자친구의 고향에 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왔고, 다시 친척형님의 자동차를 빌려서 한 시간가량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로 향하고 있다. 낯선 차 밖으로 눈에 익지 못한 풍경들이 한가득이다.
부모님 인사라고는 하나 정식으로 결혼을 승낙받기 위한 절차는 아니다. 그저 얼굴 한번 뵈러 가는 길이라고나 할까. 같은 서울이었다면 커피 한잔하고 말았을 것인데, 시골에 계시다 보니 뵙고자 하면 이곳까지 와야 했다.
모든 것이 궁금하다. 내 남자의 부모님이 궁금하고, 어떤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또 무엇을 보며 자라왔는지도 알고 싶다. 시골마을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가 보인다. 이곳의 터줏대감은 누가 뭐래도 나올시다, 싶은 모습으로 '서울아가씨 어서 오시게' 하며 반겨주는 것 같다. 어른들의 반김을 받고픈 마음에 긴장되는 마음을 나무에게나마 속삭여본다.
오는 길 내내 다니던 학교며 놀던 개울가라며 어릴 적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왼쪽귀에서 오른쪽귀로 거침없이 흘러나가기 바쁘다. 가볍게, 잠깐 얼굴 뵈러 온 거라고는 하나 일곱이나 되는 연하의 남자 애인을 둔 지금. 갑자기 나이를 물으면 어찌 대답하지 싶으면서, 큰 누나의 심정으로 몹시 초조하다. 그럼에도 최대한 긴장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밝게 웃어 보이며 인사를 할 참이다.
높다란 툇마루가 있는 집 구조다. 엄마! 하고 소리 높여 부르는 남자 뒤로 '왔어? 어서 와라.' 대답이 들려온다. 외할머니가 와 계셨다. 가만히 부드럽게 웃는 인상의 할머니시다. 한눈에 인자함이 엿보인다.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니, 반갑게 두 손을 꼭 잡아주신다. 할머니의 손이 거칠고 따뜻하다.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오신다. '오느라 고생했지? 아. 어서 와요, 먼데까지 와주시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웃어 보였다. 남자의 엄마, 어머니시다. 아들의 키는 일반적으로 엄마의 유전자에서 온다는 말에 당연히 키가 크실 거라 생각했는데 아담하신 분이다. 목소리도 크지 않으시다. 단번에 선하신 분임을 알 것 같다.
이어 남자의 아버지가 흙 묻은 장화를 신은 채 들어오신다. 한번 더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안녕하세요, 하니 나보다도 더 정중히 '아. 네. 어서 오세요.' 하신다. 옷을 툭툭 터시며, 안으로 들어오셔라 한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모른 채 묻는 말씀에 답하고, 할머니가 말하시는 누구네 누가... 어쩐다더라 하는 생판남의 이야기를 사뭇 진지하게 듣고,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다. 한 시간 두 시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또 처음처럼 꾸벅 인사를 세 번 네 번 하고선 초록색 세단에 올라탔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잘 가고, 또 와요."
외할머니의 미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차디찬 내 두 손 다시 잡으며, 잘 가라며 친손주처럼 바라보며 잡아주시던 따뜻하고 포근했던 감각이 내 두 손에 남아있다.
그렇게 하루에 거쳐 남자의 시골에 다녀왔다. 긴장의 연속이던 시간들이 서울에 도착하니 트인다. 분명 시골의 공기가 더 시원하고 쾌적함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서울에 오니 숨이 쉬어진다.
반복적인 일상이 다시 돌아왔고 바쁜 회사일에 치여 얼마간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몇 달 후면 나는 곧 서른아홉이 된다. 잠시 미뤄둔 우리 둘의 다음을 진지하게 구상할 때가 왔다. 결혼은 현실이다는 말 정확하다. 현실적인 스케줄과 경제적인 계산도 필요해진다. 하나씩 노트해 가면서 체크리스트를 메모해 보기로 했다. 생각만 하던 벅찬 일들이 종이 위에 씌여지니 우선순위가 드러난다.
여자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는 남자. 여자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는다. 끄덕끄덕 호응하며, 생각한 말들을 모아 의견을 낸다. 그 이야기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이는 여자. 들으며 이해하고 생각하다 질문을 하고, 질문을 받기도 한다. 우리의 이야기 방식은 언제나 같다. 그렇게 한참의 대화가 오간다.
사려 깊은 남자 덕에 나의 할 말이 차분하게 나열된다. 집중을 할 때면 나타나는, 차분하되 강단 있는 어투의 내 말투가 빛을 내며 우리가 함께 할 날들을 그려본다. 없으면 없는 대로 시작하자, 싶어 조심스레 같이 살 집 얘기를 꺼냈다. 욕심내지 말자하며 최대한 모아보고, 벌어나가자 했다. 남자도 여자도 기분 좋게 의견이 일치된다.
집마련을 위한 예산을 적어보고 새로 사야 할 가전과 가구도 적어본다. 새로움에 목말라 있는 편이 아니기에 꼭 사야 할 것들만 구입하자 했다. 세세한 것은 나중에 적어보기로 하고 그다음은 신혼여행 얘기를 나눴다. 서너 군데 가고픈 곳을 적어보았고, 결국은 미리 생각해 둔 곳 하와이를 최종 후보에 올려두었다. 결혼이야기가 즐겁다.
진짜 결혼에 앞서, 현실로 다가올 이야기들을 나눠보니 서로의 가치관이 같다. 딱 들어맞다. 둘 다 처음 해보는 결혼이기에 이해하고 받아들여지는 정도에 차이가 많다면 고민이 분명 필요하리라 싶었으나, 없다. 전무하다. 남자의 고향이 꽤나 멀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저 멀고 먼 지구반대편, 이름도 모르는 파란 눈의 남자가 사는 곳도 생각했는데 말이다.
결혼으로 가는 길. 다음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은 남자친구 차례다. 아직은 익숙지 않은 어색한 발음인 미래의 '장인장모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남자친구는 과연 소리 높여 '딸을 내어 주십시오!'라고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따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애원하려나?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만, 내 부모님과의 대면자리가 일생일대의 결정타인 것만은 확실하다.
서른여덟 된 딸이 마흔이 되기 전 결혼으로 가느냐 마느냐는 이제 엄마와 아빠의 손에 달렸다. 눈을 키우고 코를 높이자며 압구정 성형외과로 보내려 했던 엄마의 반응이 궁금하고, 40년 넘게 교육자 외길을 달려온 아빠의 반응도 기대된다.
나를 믿어 의심치 않는 부모님이기에 분명 나보다도 더 맘에 들어하실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내 떨림의 파동은 높아만 간다. 결혼을 준비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긴장의 연속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