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고백
창피한 것 투성이었다.
창피하지 않은 것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 인생은 온통 창피했다. 부모가 창피했고, 학교가 창피했고, 나의 가난이 창피했다.
아빠가 아파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막내고모는 빠르게 영세민 신청을 했다.
법적으로 부부로 남아있었던 엄마 아빠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법적이혼을 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지, 7년 만이었다.
나는 엄마 없는 아이에서 나라에서 영세민 혜택을 받는 공식적으로 가난한 아이가 되었다.
영세민이 되면 매달 나라에서 생계비를 준다. 영세민이 되면 학교에 내는 수업료를 감면받는다. 나라에서 주는 정부미를 사 먹을 수 있고, 나라에서 주는 쓰레기봉투도 공짜로 받을 수 있다. 병원에 가도 더 이상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나는 건강보험대상자가 아니라 의료급여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나는 내 몸에 붙은 가난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안에 심겼던 가난이 이제는 밖으로 가지를 뻗어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좋았던 것은 임대아파트였다.
단칸방 공동재래식 화장실에 벗어날 수 있었다.
방 두 칸, 집안에 있는 깨끗한 화장실. 따뜻한 물이 매일 나오는 아파트가 너무나 좋았다.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영세민이란 단어 대신 국민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나라에서 보호하는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국가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 권리를 가지는 대상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름이 바뀐다고 창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 무렵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권했다.
상고 중에서 최고였던 부산진여자상업고등학교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나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해 영도여자상업고등학교를 권했다. 그곳에서는 3년 내내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취업도 빨리 될 것이라고. 상고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인문계고등학교를 진학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대학은 사치라는 것을.
나는 여섯 시 반에 일어나, 다대포에서 영도까지 가는 11번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갔다.
등교 때는 1시간, 하교 때는 1시간 반이었다.
버스에서 내내 조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학교가 재미있지도 않았다. 또래친구들과 관심사가 전혀 맞지 않았다. 나는 외딴섬처럼 책만 읽었다. 책이라도 읽어야 견딜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도 졸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험기간이 되면 다들 나에게 공책을 빌리러 왔지만, 정작 내가 빌릴 친구는 없었다. 반에서 일등을 놓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삼 년 동안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삼 년 내내 나는 살얼음 위를 걸었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생활이 어려워졌다. 급식도우미를 하면 급식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졸업 때까지 급식도우미를 했다. 버스비 외에 용돈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받는 돈으로 스타킹과 생리대를 샀다. 제일 싼 스타킹을 열흘 가까이 신었고, 제일 싼 일자 생리대를 아껴가며 사용했다. 나라에서 주는 돈은 정말 최소한의 돈이었기에, 아끼고 아껴도 다음날 수급비가 나올 때쯤이 되면 아빠의 지갑에는 고작 몇 만 원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장학금을 타도 집안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만큼 아빠의 알코올 섭취도 나날이 심해졌다. 한때 와이셔츠 공장 사장님이었던 아빠는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것일까.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을 찾기 힘들 정도로 아빠는 점점 망가져갔다. 매일매일 아빠의 주사에 시달렸다. 기분이 좋은 날은 그래도 빨리 끝나지만, 어떤 날은 다 같이 죽자는 말을 반복했고, 어떤 날은 시험전날 집에서 쫓겨났다. 그날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아빠와 맞서 싸운 게 문제였다. 아빠는 동생과 나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9평짜리 아파트에 아빠의 고함소리가 쨍쨍 울려 퍼지는 동안에도, 나는 책과 교복을 챙겨서 친구 집으로 갔다. 시험에서 일등을 놓치면 안 되니까.
한 번이라도 장학금을 놓치면 삼 개월은 살기가 더 힘들어지니까. 친구들에게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사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데 더 급급했다. 견딜 수밖에 없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된 이후부터 물욕 아닌 물욕이 생겼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샀고, 서랍 가득 제일 비싼 날개 달린 생리대를 쟁여놓았다. 뭘 사든지 떨어지지 않게 쟁여놓는 습관이 생겼다. 샴푸, 린스, 비누, 치약 같은 생활용품이나 스킨, 로션, 크림 같은 화장품을 살 때도 더 싼 걸 찾느라 비교하지 않았다. 새 옷은 명절이나 엄마를 만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나는 다 입지도 못하는 옷을 계속 샀다. 내 마음속 응어리가 없어질 때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이들에게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사람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내가 그렇게 나 자신을 포장해 보인 결과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렵다.
어디 고등학교 졸업 했어요,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
내가 기초생활수급자였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기가 두렵다.
엄마가 집을 나간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처럼, 고생이라고 해본 적 없는 아이처럼,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란 아이처럼. 겹겹이 포장지가 쌓일수록 두려웠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그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나는 심리 상담을 받았다. 상담 선생님은 매번 물었다.
- 하늘 씨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창피하다는 말은 못 할 거예요.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그 가난한 시절을 견뎌내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잘 살아내어 왔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아낼 것이라고.
서투른 나의 고백이 언젠가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