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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사랑만이 현실이다

진짜 사랑이면 그 무엇이 문제일까

by 우니아빠

# 결혼 1000일 기념일에 읽는 연애 1000일 편지


"그 무엇보다 상대방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미안해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하루하루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서로의 행복을 기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결혼한 지 딱 1000일째, 와이프는 임신 5개월 차였다. 롤케이크에 숫자 촛불로 1000을 만들어 꽂고 축하하며 지난 세월 나누었던 우리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연애한 지 100일이 되었던 날 처음으로 편지를 주고받고 나서는 심하게 싸우고 나서 화해를 청하던 날도, 생일이 같기에 매년 생일을 함께 맞는 날과 그 외에 모든 기념일에 우리는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물론 내가 군에 입대하고 훈련소에 있던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편지가 오죽 많았으랴. 30리터짜리 김장봉투에 보관된 편지를 이것저것 읽으면서 그때가 그리우면서도 아련한 마음에 서로 울먹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마침 연애 1000일 기념으로 그녀에게 쓴 편지를 찾았다. 그때 나는 군인이었고 이 사람은 교환학생으로서 스웨덴에 있었다. 방학 때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자 해외로 떠났기에 한두 달 이별한 적은 많았고 군대 입대 이후 더 자주 못봤지만 6개월 넘게 그녀를 못 보는 것은 처음 맞는 긴 이별이었다. 그것이 당시 나에게는 시련이자 사랑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 볼 기회였던 것 같다. 20대 초반에 사랑을 저렇게도 멋지게 정리했다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 내게 사랑을 설명하라면 저렇게 간단명료하고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십년 전의 우리를 마냥 귀엽고 철없게 생각하며 당시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나니 실상 그때가 더 진리에 맞닿았던 삶은 아니었는가도 싶다.


# 결혼은 사랑만이 현실이다.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어떤 말인지는 알겠다. 결혼은 두 사람이 살림을 합쳐 먹고사는 일이며 그냥 둘이서 좋은 날 만나 연애할 때랑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사랑만으로 못하는 결혼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결혼은 사랑만이 현실이다. 사랑은 죄가 없는데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잘못 쓰고 있을 뿐이다.


네가 뭔데 사랑이 뭔지 함부로 정하냐고?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사랑에 대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문장들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일 뿐이다.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를 보면 '저것이 진정한 사랑이지'라며 감동한다.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가난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자식들을 부양하고 사랑으로 아껴주는 부모를 보면 또 '저것이 진정한 사랑이지'하며 감동한다. 우리가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없다고 할 때 말하는 사랑은 연애할 때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푹 빠진 남녀를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틀렸다. 서로에게 푹 빠진 남녀의 관계를 표현할 때 가장 정확한 단어는 성욕이다. 본능적인 끌림에 키스하고 싶고 조금만 떨어져도 보고싶어서 함께만 있으면 마냥 달콤한 연애감정이 성욕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쯤은 사춘기만 지나도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성욕인가? 우리가 감동을 느끼는 노부부의 사랑이 적어도 성욕은 아닐 것이다.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는 '틀린' 말은 그렇게 사랑=성욕이라는, 우리 스스로도 깊은 생각 속에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등식 속에서 태어났다. 모두가 사랑이 단순히 성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꼭 결혼을 말할 때는 말도 안되는 등식을 함부로 성립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의 흔하게 회자되는 결혼은 정말로 '사랑이 빠진 현실'이 되었다. 물론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서 사랑도 하는 결혼'을 말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짜 현실은 서로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해놓고서는 서울에 전세 아파트라도 구해오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고백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고 돈이 많지 않으면 자녀 교육도 힘드니 자녀 교육도 사랑이 아닌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회자되는 결혼은 두 사람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재산의 합침이거나 남에게 자랑하기 괜찮은 아이의 생산, 집안 간의 의전적인 만남 같은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통해 행복해진 나는, 내 배우자를 만난 덕분에 너무도 부족한 인간에서 그나마 어딘가 쓸모는 있는 인간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하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랑이 아닌 현실' 같은 것에는 행복한 결혼도, 행복한 삶도, 행복한 자녀도 깃들기 힘들다. 물론 정말 운 좋은 소수에게는 그런 곳에도 행복이 깃들 수 있고 어떻게든 결혼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오늘도 기도하지만 말이다.


군대에서 내가 쓴 이 사랑에 대한 나름의 정의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너무 협소한 정의 같기도 하다. 사랑이 꼭 항상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저 글귀에 그토록 감명을 받았던 이유는 각자가 나름 상대방에게 미안했던 기억과 그를 통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각오하며 열심히 하루를 채웠던 기억, 그리고 그렇게 더 나은 자신이 되어 상대방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원했던 기억들이 생각나서 그토록 감명이 깊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사랑하면 어딘가 미안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갈 수도 없다. 순간이동으로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다. 내 마음도 내 것이 아니다. 화나고 싶지 않은데 화나기도 하고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미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누군가에게 무한히 잘해주고 싶은, 사랑이라는 잣대 속에서 돌아보면 늘 자신의 부족함 먼저 떠오른다. 상대방의 잘못을 탓하며 싸웠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하면 그저 미안하다. 미안해하는 서로가 만나면 더 나은 서로가 되자고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을 갖고 열심히 살더라도 다시 미안함이 생긴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내 옆에서 늘 함께 있어주면 나 역시 함께 있어주고 싶어 진다. 그리하자면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좀 더 맛난 음식을 안락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면서 악착같이 아끼게 된다. 인격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어제보다는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고 싶어 하며 서로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그런 기도는 신을 부르짖는 어떤 요청이라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진실한 다짐과 소망의 모양새를 띤다. 설령 정말 신이 존재할지언정 언제 들어줄지 모르는 나의 이런 소망을 가만히 둘 수 없어 매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내가 신인 것처럼, 내가 언젠가는 나의 그 기도를 스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처럼.


그렇다고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기만 바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이 사람을 위해 돈이 정말 많고 싶지만 정작 나는 그냥 함께하는 식사 한끼면 행복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돈이 많고 싶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이 사람이면 족하다.


직장에서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 있다. 은행 지점의 직원들이 특정 업무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때 상담해 주는 전문 상담팀의 팀장님이신데 직장에서 돈을 더 주지 않아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하신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최선을 다하시고 집에서는 자녀들의 다소 특이한 진로 결정도 아낌없이 응원해 주시는 정말 훌륭한 분이셔서 내가 매우 존경하는 분이다. 그런데 늘 어떻게 저분은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분이 되었을까 생각했는데 팀장님의 부친상을 방문하며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결혼의 본질이 사랑에 있고 그것만이 현실임을 다시 느꼈다.


업무 일정 때문에 나는 팀장님의 부친상을 홀로 방문해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옆에서 팀장님의 어머니께서 눈물을 훔치시며 지인 분들께 당신 배우자가 임종하시기 직전 며칠을 회상하고 계셨다. 점점 몸상태가 악화되면서 당신의 오랜 반려자가 자신을 떠나는 게 임박했음을 직감하셨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때 몸져누운 남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보, 힘든 거 내가 다 아는데 조금만 더 살아... 내가 열심히 밥 해주고 죽해줄테니까 오늘만 더 살고 내일이 되면 또 내일만 더 살아. 그렇게 조금만 더 살아..."

한 번 울음보가 터지면 울 때 소리가 나는 편이라 나는 울음보가 터지기 싫어 어느 순간부터 스마트폰을 켜고 뉴스를 보고 딴생각을 하며 그분의 그런 슬프고 아름다운 회상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두 분은 팀장님을 낳기 전부터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렇게 서로를 아끼셨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두 분이 서로를 아끼시니 얼마나 열심히 사셨을 것이고 그런 서로에게 또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우셨을까. 장례를 모두 마치고 휴가에서 복귀하신 팀장님께 내가 들은 이야기를 전해드리며 평소에도 부모님께서 서로를 그렇게 아끼셨냐고 여쭈어보았다. 역시나 그렇다고 하셨다. 그렇게 보니 서로를 아끼면서 열심히 사는 부모에게 과연 훌륭하지 않은 자녀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 내가 존경하는 팀장님의 탄생 비밀이라도 안 것만 같았다.

이것은 소수의 사례가 아니다. 나는 높은 소득 수준과 자산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유복함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부부 사례를 많이 접했다. 또 소득이나 자산 수준이 높지 않음에도 부부가 함께 화기애애하게 은행을 방문해 서로를 위해 적금을 들거나 자녀들의 통장을 만드는 등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례들을 은행에서 일하며 숱하게 보았다.


물론 빈곤하고 가난한 환경이 서로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기 쉽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2023년 대한민국에서 배우자를 결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먹고 입고 자고 치료받는 것에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악착같이 실천했을 때 건강한 남녀가 빈곤한 가정을 일구기 또한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수억이 넘는 자산가가 될 수는 없지만 건강하기만 하다면 적어도 빈곤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리고 지금 소득이 높다고 해도 그것이 평생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서로를 먹여살리기 위해 남루한 차림으로 젊은 날의 자신이 보기에 창피하고 비루한 일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게 인생이다. 그리고 결혼이 진정으로 의미있는 순간은 서로 풍요롭고 안락한 순간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절박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살다보면 그 순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오기 마련이다. 때문에 결국 결혼은 사랑만이 현실일 수밖에 없다. 사랑만이 현실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에게 결혼, 출산, 육아 모든 것에 좋은 인생이 깃들 것이라고 선언하며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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