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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니아빠 Nov 13. 2023

사랑하면 계속 질문이 생겨요

당신이 진정 누군지,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1. 설국열차


최하층 인류의 지도자 커티스는 기차의 설계자이자 우두머리 윌포드에게 거의 설득되려는 참이었다.

고립된 기차에서 균형이란 생존의 필요조건 그 자체.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는 당연한 세계의 구조이며 그 구조 속에서만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두의 생존을 위해 때로 폭력적인 방법으로라도 인구를 조절해야 한다는 윌포드의 말도 기차 속에 갇힌 전 인류의 상황을 볼 때 맞는 말이다.


그런데 별안간, 마모된 부품대신 뜨거운 엔진실 구석에 처박혀 환각물질에 취해 부품으로서 응당 해야 할 동작만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아이를 발견한다. 커티스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이게... 맞아?"


#2. 소크라테스 형은 왜 위대한가


그런데 T는 도서관에서 별안간 무엇을 깨달아 1년 만에 자신이 틀렸다고 흥분해 외친 걸까?

1학년 1학기, 그가 수강한 철학입문은 한 학기를 전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채운 강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직접 책을 남긴 적이 없으므로 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통해 그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유추하는 수업이었다. 한 학기 전체의 주제가 사실상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교재로 쓰인 플라톤의「국가론」을 중심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강의 후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한 플라톤의 다양한 저서에 대한 요약을 제출하는 것이 과제로 주어졌다. 하지만 T는 과제를 하고 수강을 하면 할수록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소피스트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다. 고등학교 때 배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궤변론과 맞서 싸운 철학의 영웅이었는데 막상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고전을 읽고 보니 T에게 더 납득이 안 가는 존재는 소크라테스였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늘 이런 식이 었다.

소피스트 A: 정의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오. 모든 국가는 그 사회의 강자들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처벌을 가해 죄인으로 만들지. 때문에 정의란 것은 현실적으로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소.

소크라테스: 법을 제정하는 강자들도 때로 실수를 하지요. 그러면 그 실수까지도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요?

소피스트 A: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정의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당신의 말은 틀렸소.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말 안에 숨겨진 틈을 질문해 상대방을 곤란하게 한다.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 본인은 논쟁을 하는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곧잘 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T의 생각이었다. 물론 플라톤이 쓴 글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가 플라톤 생각이고 소크라테스 생각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거의 모든 대화 속에서 대화의 주제가 되는 '정의', '올바름' 같은 개념에 대해 명확한 정의라든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내놓지 않았다. 가장 명확한 것은 그가 상대방의 말에 허점이 있다는 것만큼은 명확하게 밝혔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T는 철학입문 수업을 마무리하는 기말고사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소크라테스의 정의론에 대해 논평하라는 마지막 문제에 이렇게 적었다.


' 플라톤의 「국가론」1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정의한 정의에 대해 여러 현실적 사례를 들며 그 정의의 불완전함을 밝히는 데에는 명석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본인은 정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저 그와 논쟁하는 이들이 주장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한다', 혹은 '강자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에 반대의 뜻을 가진 명제인 '참된 통치자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자다.'라는 말로 「국가론」1장을 마무리한다. 과연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논쟁에 참된 통치자가 진정 누구인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지는 의문이며 또한 참된 통치자라는 단어에서 과연 '참되다'는 것은 무엇인지도 그는 밝히고 있지 않다. 글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 정의의 실천적 주체가 참된 통치자이며, 참된 통치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에 '정의란 강자가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고 해보더라도 과연 타인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헛점이 없는 정의론인지 역시 의문이다. 그가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처럼 그의 주장에 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은 애시당초 논평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의의를 찾아보고자 「소크라테스의 변론 」에서 나오는 그 스스로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른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스스로 정의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며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정의나 선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것들의 정체에 관해 정확히 사고하고 사람들이 당대에 거의 없다는 점 만큼은 잘 드러낸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의 필연적인 한계로서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는 아닐까.' 


이렇게 쓰면 분명 마지막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0점 처리가 될 것을 T는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T가 생각하는 대학 공부는 학점을 받기 위해 교수님 말씀을 따라 쓰는 앵무새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틀렸다고 해도 자신이 노력해 얻은 공부 결과를 시험에 적어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그가 생각한 공부였다.

물론 그는 학점 3.5를 넘어야 수백만 원이 넘는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처지였기에 마냥 대학 신입생의 패기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기말고사의 다른 문제들이 모두 플라톤의 「국가론 」 내용 자체를 확인하는 문제였고, 그는 국가론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기에 다른 문제들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모두 고득점을 예상하고 마지막 문제에서 호기를 부린 것도 있었다. 모든 문제의 배점이 같다면 철학입문 과목에서의 T의 성적은 T 본인의 예상으로는 B+, 최악의 경우 B였다. 결과는 C+였고, 이는 그의 예상보다 매우 낮은 점수였다. 마지막 문제가 시험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 듯했다. T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자신의 논평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고 싶었다. 


 그 후 1년 동안 그는 서양철학에 몰두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탈레스부터 그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데카르트, 칸트와 같이 고등학교의 철학 관련 과목인 「윤리와 사상」에 등장하는 서양철학사의 거의 모든 철학자에 대해 공부했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T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보다는 훨씬 진보되어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에 대해 확실한 정의를 내리고 생각을 개진한다. 그 서술들이 워낙 난해해 읽기는 어려웠으나 T에게는 그걸 자신만의 언어로 요약해 내어 그들의 생각을 이해했을 때의 지적 쾌감도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철학자인 니체에 이르러서도 도저히 소크라테스가 철학에서 한 학기 내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인물인지 납득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머릿속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부수어지고 때마침 그때 쯤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은 어쩌다가 그의 머릿속에서 부서졌을까. 발단은 다른 여자에게서 성욕을 느끼고 다른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끼면서, 또 T 자신의 잘못으로든 A의 잘못으로든 A와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는 경험을 쌓아가며 생겼다.

 

'내가 지금 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은 사랑일까? 그렇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A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A에게도 여전히 성욕을 느낀다. 그렇다면 저 여자와 A 모두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야, 나는 처음에 A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것이지 성욕을 느낀 건 아니야. 그렇다면 매력을 느끼는 것이 사랑일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매력을 느낀 모든 여자를 나는 사랑한 것일까?'

'이렇게 싸우면서 서로의 가슴에 흠집을 내는 것은 사랑일까? 나는 때로 그녀가 밉다.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렇다면 A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A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 말한 때는 언제인가? 그때 내가 생각한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진정 사랑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과연..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A를 보면서 착잡함과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혼란이 지속되면 결국 이별인가 하고. 또 이래서 주변 선배들이 신입생 때 만난 동기 커플은 다 오래 못 간다고 그랬던 것인가 하고.

그렇게 그의 머릿속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득 차면서도 또 한편 사랑의 대상이었던 A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와중 그는 또 한 번 A에게 화를 내버렸다. 아침 A와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려는데 그녀가 가방 속 지갑을 못 찾아 헤매면서 열차를 놓쳤고, 그 때문에 1교시에 T가 지각할 위기가 생긴 것이다. A는 2교시가 첫 수업이었기에 T에게만 위기였다. 시간에도 강박적이었던 그는 A를 차갑게 나무랐고 A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아, 이게 아닌데...'


 T는 또다시 A가 자신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는 계획, 시간 이런 것에 꽤나 강박적이었다. 이 역시 자신이 닮기 싫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이런 강박적인 면모 때문에 A가 이전에도 상처를 받고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마다 더 나아지리라 다짐하고 스스로를 고쳐나가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세간의 말처럼 T는 이따금 그렇게 돌변하고는 했다. T도 자신의 그런 모습에 지쳤다. 사랑이 뭔지도 헷갈린 마당에 더 이상 A를 힘들게 하기도 싫었다.


 혼자 이별을 결심하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며 이별을 고할지 T는 자신의 고시원 방에 누워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을 상상하든 목이 막히고 양 눈 옆으로 눈물이 줄줄 새 나왔다. 소음 차단이 전혀 되지 않는 고시원 방이기에 울음을 삼키며 새로운 말을 지어내다가도 그녀와 이별을 상상하면 어디서 생겨났는지 새로운 눈물이 또 베개를 적셨다. 그렇게 수 많은 말을 뒤로 하고 그에게 한 문장만이 남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은 하고 싶지 않았고 이별은 어떻게 상상하든 그저 눈물의 지옥이었다. 그는 일단 그 스스로를 용서하고 몇 번만 더 기회를 줘보기로 했다. 분명 대학교 2학년이 된 지금은 1학년 때보다 훨씬 성숙하게 그녀를 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더 좋은 존재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그녀는 내년 나에게 이별을 고할 기회가 아주 많다. 내년 5월 논산훈련소 입대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1년도 남지 않았고 반년 조금 넘게 남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때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유명했던 그룹 가수의 노래가사 처럼 T는 그녀를 만나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단지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의 눈물과 표정에 많은 것이 담겨있었는지 A는 그를 용서했고 그들은 다시 달콤해졌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서 T는 다시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A를 사랑한다. 사랑이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 A를 사랑한다. 이건 단순한 성욕이나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성욕과 매력을 느끼는 걸 넘어 나의 감정과 감성, 생각을 모든 것을 다해 A를 생각하고 아낀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런 걸 느꼈기에 사랑이 위대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려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님도 사랑이 으뜸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과연 사랑이 뭘까...?'


 예전과 같지만 또 다른, 사랑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T는 늘상 하던 대로 도서관 자료실에 앉아 철학 책을 골라내고  읽었다. 그러던 중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며 세 문장을 적는다. 워낙 이해하기 힘든 철학자라 그와 관련된 책들을 옆에 쌓아놓고 일종의 퍼즐을 맞추는 중이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도 암시할 수 있다."

"우리를 사로잡는 혼란들은 언어가 작용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헛돌고 있을 때 일어난다."


이 세 문장을 쓰고 그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잠시 그 문장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윽고 다시 펜을 들어 다시 세 개의 문장을 적었다. 


"사랑은 사랑에 관한 사실들의 총체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랑을 명백하게 나타냄으로써 말할 수 없는 사랑도 암시할 수 있다."

"사랑에 관해 우리를 사로잡는 혼란들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작용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헛돌고 있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 말을 비트겐슈타인에 관해 가장 유명한 한 문장과 연결해 보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사랑도 그러하다."


T는 자신이 확실히 A를 사랑한다고 느꼈던 때의 사실들을 모아보았다.

'분명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마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만난 지 100일을 맞아 편지를 쓸 때였던 것 같다. 어째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기꺼이 나왔을까.'


그의 머릿속에서 질문과 함께 여러 장면들이 어디서 머릿속에 여러장의 사진을 출력해주듯 떠오른다. 자신의 가정사를 터놓으며 눈물을 보였을 때 A가 말없이 안아주던 장면, 분명 학교에서 하루종일 보았음에도 A를 집에 돌려보내고 밤이 되자 잠이 못 들 정도로 한없이 A가 보고 싶었던 기억 같은 것이 떠올랐다. 100일 편지에서 쓴 사랑은 그러한 사실들의 총체였을 것이다.


 A에게 간절히 사랑을 속삭였던 때가 또 언제였던가 T는 다시 돼 내었다. 아마 1학년 여름방학 그녀가 가족을 보러 일본으로 떠날 때였다. 두 달 동안의 이별이었지만 연애한 지 4개월 남짓밖에 안된 T에게 난생 처음 마음을 준 A를 두 달이나 못 본다는 것은 어지간히 슬펐는지 선유도 공원에서 한참 사랑을 고백하며 눈물을 보였더랬다. 또 직접 도시락을 싸서 자신과의 소풍을 준비해 온 따뜻한 봄날 A의 모습, 산악부에 들어가 첫 3박 4일 종주훈련을 마치고 다리에 알이 배겨 걷기도 힘들었지만 4일 내내 힘들 때마다 그리워했던 A를 볼 생각에 들떴던 자기 자신, 처음 A에게 크게 화를 내고 너무 미안해 눈물을 흘리며 변화를 다짐하던 기억 등을 함께 떠올렸다. 


 그렇게 확신에 차서 A에 대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때를 떠올리면 늘 다른 어떤 기억들이 함께 떠올랐다.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들뜨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다. 기억들 사이에 명확한 공통분모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A에 대한 그런 아련한 기억, 사실들의 총체였다.


그렇다면 그 모든 기억들 하나하나는 사랑일까, T는 다시 생각했다.

'지리산에서 그녀를 그리워한 것은 사랑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랑은 단순한 그리움 그 이상인 것 같다.'

'그녀에게 내내 미안해한 것은 사랑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단순히 미안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길 가다 부딪힌 사람에게 미안했던 기억도 사랑이라고 해야 한다. 사랑은 단순한 미안함 그 이상인 것 같다.'

'그녀에게 고마워한 것도 사랑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아닐 수도 있다. 모르는 이의 작은 호의도 무척 고마운 것이나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진심으로 A를 아끼는 것은 사랑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또한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그녀를 아낀다는 이유로 다른 남자들과 교류를 할 때 질투하고 경계한 것은 A에 대한 내 욕심이었지 사랑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T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명백히 말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인가?

곰곰이 고민한 끝에 그는 몇 개를 확신할 수 있었다.

'A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괴롭게 했던 나의 모든 행동들은 사랑이 아니다.'

'A가 괴로워하지 않았더라도 내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행동들은 사랑이 아니다.'

'또한 A가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때로 나를 괴롭히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싸우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 사랑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사랑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사랑이 무엇은 아닌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T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난 몇 달간 T가 사랑에 대해 혼란을 가졌던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작용하고 있지 않고 헛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관한 사실을 만들지도,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 명확히 고민하지도 않던 그가 막연히 다른 여자에게 성욕이나 매력을 느끼며 사랑을 생각한 순간, 분명 사랑을 생각했음에도 그 안에 사랑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무엇이 아닌지' 명확히 아는 것. 그것에 집중했던 것이다.

세상이 그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치켜세우는 것인지, 또 그에게 철학입문을 강의했던 교수도 그런 이유로 한 한기 내내 소크라테스를 다뤘는지는 알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T는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냉소적으로 써낸 철학입문의 기말고사 마지막 문제는 명백히 틀렸다는 것과 자신이 그 깨달음으로 인해 지금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T는 이후 A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마다, 혹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스스로 맘 속으로 묻는 버릇이 생겼다.


'이게 진짜 사랑이 맞나?'



2023년 A의 주석:

어쩌면 바로 이전 글의 연장선이다. 정말로 의미있는 공부는 정말로 의미있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하는 능력은 문제 해결 능력보다도 질문을 만들어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하고 답을 알고 싶어하는 순간, 그 간절함의 깊이에 따라 어디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까지 정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앞서 사랑한다는 것과 공부한다는 것은 비슷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말과 질문을 만든다는 말 역시 비슷할 지도 모른다. 질문을 해야 공부가 시작되고, 질문이 끝나는 순간 공부도 끝나는 것처럼 사랑 역시 그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고 질문이 없어지는 순간 끝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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