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 暴風前夜
폭풍이 치기 전날 밤.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고기압 상태가 형성되어 평온한 날씨가 되는 것처럼, 큰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분위기가 고요해지는 것을 말하는 관용어.
저는 지금 감정의 폭풍전야에 있습니다.
요즘, 많은 아픈 감정들로 인해 한동안 괴로운 일상을 보냈어요.
일을 하다가도 감정이 밀려와 우울해지고, 혼자 생각에 잠길 때면 분노, 해방감, 기쁨, 슬픔, 희열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날들이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지금 나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을 정도로 감정이 날뛰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들 전에 꼭 찾아오는 시기가 있어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잔한 며칠.
차분한 감정들이 하나씩 들이닥쳐요.
우울한 하루, 기쁜 하루, 어딘지 모르게 해방감을 느끼는 하루.
그렇게 하루하루 감정을 버티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건 항상 똑같아요.
공허함.
이번에도 어김없이 공허함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오늘은 문득,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이 하루가 훅 지나가 버렸습니다.
글도 잘 안 써졌고요.
감정이 많았던 날보다 글이 덜 써지는 걸 보니, 참 이상한 날이죠.
기억을 더듬어 봤어요.
이렇게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날이 또 언제 있었더라?
그때 생각났어요.
언제나 큰 감정이 몰려오기 전에, 이런 공허함이 먼저 찾아왔다는 걸요.
마음이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곧 큰 감정이 들어올 거니까, 마음 좀 비워놓자.”
예전엔 이걸 몰랐기 때문에, 감정이 몰려오는 순간만 힘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알겠어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그래서 더 무서운 거겠죠.
‘또 외로움에 휩싸이면 어쩌지?’
‘또 전 애인이 건드려서 괴로워지면 어쩌지?’
‘그 사람이 그리워서 또 무너지면 어쩌지?’
이런 무서운 질문들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아요.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학 시절에도 그랬던 날이 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면 분명히 재미있어야 하는데,
어딘가 빠져 있는 느낌.
그래서 시험기간에 혼자 도서관, 과방, 실험실을 떠돌며 공부했어요.
효율이 좋지도 않은 방식인데, 그냥 그게 좋았어요.
시험이 끝나고 지인의 생일파티에 갔을 때, 전 애인을 우연히 만났어요.
멀리서 온 거였지만 별 생각 없이 나간 자리였고,
그녀는 저에게 선물이었어요.
아무 감정 없던 상태에서 갑자기 폭풍처럼 감정을 몰고 왔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지금 이 공허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좋은 감정이 찾아오기 직전의 침묵일 수도 있겠구나.
요즘은 너무 아픈 감정들만 겪다 보니까,
공허함만 찾아와도 ‘이번에도 또 아픈 감정이 오겠지’라고만 생각했나 봐요.
그런데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겠네요.
물론, 높은 확률로 아픈 폭풍이 찾아오겠죠.
왜냐면 이번 공허함은 전보다 훨씬 무겁고 낯설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폭풍을 기다려보려 합니다.
기대는, 할 수 있는 거잖아요. :)
그리고 정말 아픈 폭풍이 온다면,
그것도 그냥 온몸으로 받아내면 되는 거죠.
그렇게 또 공허함이 지나가고,
다시 폭풍이 몰려올 때는…
그땐, 좋은 폭풍이 올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