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한 연락

by 백목이

금요일 퇴근 1시간 전, 오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나 오늘 여자 친구 보러 올라왔는데, 같이 볼래?”


우리는 원래 게임으로 친해진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인지 직접 만나는 것보다 게임으로 함께한 시간이 훨씬 많은 친구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은 왜인지 모르게, 오랜만에 보더라도

끈끈한 우정이라는 게 남아있는지 우리는 가끔 1년에 한 번씩만 봐도 재밌게 놀곤 했다.


이 친구의 여자친구는,

즉 내 전 여자친구의 친구였다.

알게 된 경위는 친구와 게임을 하다가,

그의 여자친구와도 함께 게임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시험이 끝나고 한 번 보자는 친구의 권유에

다 함께 만나서 놀다가 나의 전 여자친구를 만났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작은 기대를 했다.

항상 둘이서만 만나던 애들이 갑자기 나를 불러?

혹시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 동네에는 그 사람도 살고 있고,

동네가 워낙 좁아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나를 실망시킬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오랜만에 사람 사는 이야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만나러 갔다.


그래도 시 하나를 옮겨가야 해서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우리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근황 이야기부터 나눴다.


원래는 나 말고 그 사람을 만나기로 하였다고 친구 여자친구는 말했다.

하지만 내 친구가 온다고 하니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와는 친구이고,

나에게 이야기가 흘러들어 갈 수 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술을 마시고,

그 커플들은 우리의 연애 이야기와 헤어진 경위를 궁금해했다.

나는 친구 여자 친구에게 “너, 그 사람한테 뭐 들은 거 없어?”라고 반문했고,

딱히 들은 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연애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그 사람이 최근에 연락한 거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최대한 짧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깊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실, 깊게 들어가면 내가 힘들어질까 봐.

조금은 유쾌하게,

조금은 무덤덤하게,

조금은 미련 있게 말을 꺼냈다.


그렇게 내 친구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넌 보험이네.”

라는 말을 자기 여자친구 앞에서까지 했다.


원래 빠꾸 없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혹시 그 친구가 전해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덤덤하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ㅎㅎ”

라고 넘겼다.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난 보험이다.”

그 말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왔지만,

친구의 입에서 들으니 조금은 확 와닿았다.


난 그렇게 이야기를 제대로 하진 않았다.

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나저나,

그 동네를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감정에 졌긴 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 유흥거리,

그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던 문어숙회집,

같이 갔던 술집 등…

많은 것들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맥주를 수도 없이 마시고,

내 친구는 만취했고,

나는 적정선에 멈췄고,

두 명을 데려다주고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쉬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보고 가고 싶다…

얼굴 보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

근데 내가 아직 좋아하면 연락 안 하겠다고 말까지 했는데, 해도 되나…’


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여태껏 눌러온 감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국 연락을 했다.


‘00 거리 앞인데 안 자면 잠깐 나올래?’

이렇게 그냥 보냈다.

10분만 기다리자,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결국 10분은 깨졌고,

난 “미안, 감정 있으면 연락 안 한다 했는데.”

라는 말을 뒤로 택시에 올라탔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새벽 1시,

그 사람이 잘 수도 있고, 안 잘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고,

다음 날, 다다음인 오늘도 오지 않았다.


처음엔

‘뭐라도 말이라도 해주지…’ 하면서 생각하다가,

결국 그 사람도 거절도 못 하고,

받아주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그냥 내 할 일들을 다시 묵묵히 했다.


토요일은 대학 선배들과 술자리,

오늘은 카페 와서 밀린 감정 정리와 글쓰기를 하기로…


내가 보낸 카톡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정말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뭔가가 있겠지,

생각 중이겠지,

하면서.


다시 나는 내일부터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 그 감정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감정을 마주하라곤 하지만,

마주하면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먹혀도 다시 나와 내 일상을 살아야 한다.

그게 마주하지 않고 버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고,

그렇게 해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좋은 방향으로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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