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잠시.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가 차린 주물 공장에서 동업자로부터 결제 대금을 횡령당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고, 저희 가족은 다시 정말 낡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습니다. 2001년에 저와 11살 차이가 나는 막내동생이 태어났는데, 우리 막둥이는 태어나자마자 집안의 몰락부터 겪은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작은 방 하나에 여동생 둘과 부모님, 그리고 제가 모두 함께 지내야 했죠. 사춘기 시절, 비좁은 공간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제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평생 아버지가 술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어머니와 크게 싸우는 아버지를 보고는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집을 나섰습니다. 어린 마음에 집안이 너무 싫었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반항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쳤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에게 "대학을 가지 말던가, 갈 거면 네 알아서 가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부모가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얘기를 하셔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안 가게 마음이 아픕니다.
용돈이 필요했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중국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아직 운전면허도 없던 터라 배달은 근처 가까운집은 걸어서 철가방을 들고 했고, 조금 거리가 있으면 사장님이 직접 가셨어요. 그리고 배달이없을땐 단무지를 미리 포장해두거나 전화를받고 주문서를 정리하고 주방에 음식 나오는 순서를 조율하는 등의 소통을 주로 담당했어요. 그때 당시 시급은 2,300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오토바이 면허를 따고 나서는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도 하게 되어 2,800원으로 올랐고요. 당시 일하던 중국집 '미선각' 사장님께서 밤마다 넓은 공터로 데려가 오토바이 연습을 시켜주기도 하셨어요. 배달을 다니다 보면 횡단보도 같은 곳에서 다른 가게 배달원들과 항상 얼굴을 마주치게 되어 있는데, 저는 항상 먼저 밝게 인사하고, "식사 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를 씩씩하고 밝게 외쳤습니다.
다른 가게 사장님들이 그런 저를 예쁘게 보셨는지, 얼마 안 가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미선각 사장님께서는 흔쾌히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일해보라고 권유도 해 주셨어요. 그리고 처음 옮겨본 중국집에서는 3,200원, 다음 치킨집에서는 3,500원, 또 다른 피자집에서는 4,000원, 또 다른 중국집에서는 4,500원, 그리고 족발집에서는 5,000원까지 시급이 올랐죠. '최저임금'과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의 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최저임금에 기대지 않아도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된 것 같아요.
비록 집안 형편은 어려웠고, 부모님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저는 저만의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소프트웨어 개발 및 홈페이지 제작 대회에서 상을 많이 받으며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국 정보올림피아드 대회에서 금상을 받고, 다음 해에는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 수상 경력 덕분에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죠. (사실 공부는 하지 않아서 성적이 좋지 않았거든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엔 콧대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저는 제가 대단한 존재라도 된 양 한참 자만할 때였습니다. 컴퓨터를 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죠. 하지만 그 자만심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실패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