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잘 고치는 동네꼬마

나의 어린 시절과 컴퓨터 이야기

by Travis W LEE

C:\>_

1994년,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들, 고모, 부모님과 저와 여동생까지. 3대가 작은아파트에 옹기종기 살던시절, 회사에 다니던 큰삼촌이 회사에서 지급받은 컴퓨터를 집에 가져오셨습니다. 당시 5살이던 저는 삼촌이 실행시켜주는 보글보글과 위험한 데이브 같은 게임을 열심히 했죠. 어느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나가신 틈을 타 게임이 하고싶었어요. 컴퓨터 전원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몇번인가 플로피 드라이브에서 삐비빅 소리가 나고는 화면에 C:\>_ 만 떠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키보드에 아무거나 눌러봤는데 어떤것도 실행될리가 없죠. 계속해서 오류만 반복해서 나오다, 눈에 들어온 책한권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컴퓨터 길라잡이'


이 책은 7일동안 MS-DOS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안내하는 책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영어도 서툴고 한글도 서툴어서 인쇄된 그림만 봤던 것 같아요. 비슷하게 생긴 알파벳을 하나씩 키보드에서 찾아 누르고 엔터치고를 반복하며 괜히 디렉터리를 만들고, 이동과 목록보기, 파일 이동, 복사만 몇번씩 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집에 돌아오실 때 까지 결국 게임은 실행하지 못했어요.


386 컴퓨터

1996년, 부모님은 할아버지 댁에서 독립하여 조그만 슈퍼마켓을 차리셨습니다. 저는 여동생과 이 '점방' 에 딸린 방에서 옹기종기 자랐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은 늘 저희에게 최선을 다해주셨죠. 특히, 아버지가 무리해서 장만해주신 '386 컴퓨터'는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이미 윈도우가 3.1을 지나 95가 출시되었을 시점이었지만 그래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였을 컴퓨터를, 아버지는 아마도 자식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막연한 기대로 어렵게 구해오신 모양이었습니다.

그 컴퓨터에는 MS-DOS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삼촌에게 건네받은 '안녕하세요 컴퓨터 길라잡이' 책을 보고 플로피디스크에 게임을 담아 복사하고, 실행하며 자연스럽게 DOS 환경에 익숙해졌습니다. 까만 화면에 흰 글씨만 가득한 그곳에서, 저는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습니다. 명령어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반응하는 것이 신기했고, 게임 속 세상을 탐험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윈도우 95

어느 날,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윈도우 95' 설치 디스크를 얻게 되었습니다. 50개가 넘는 플로피디스크를 밤새도록 교체하며 설치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운영체제가 주는 설렘과 호기심에 밤을 새우는 줄도 몰랐죠. 삐걱거리는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 소리와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설치 진행률은 저에게는 최고의 스릴이었습니다.

그렇게 컴퓨터와 씨름하며 자연스럽게 컴퓨터 수리 기술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뭐 사실 수리기술이라고 해봐야, 동네 이웃집 컴퓨터들을 돌아다니며 하드디스크를 포맷하고 윈도우를 깔아주거나, cpu나 메모리를 빼서 슬롯을 닦아 다시꽂는정도의 원시적인 조치방법, 메인보드의 수은전지를 뺐다가 초기화한다음 BIOS설정을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어느새 동네에서는 저를 '컴퓨터 박사 꼬마'로 불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파워포인트나 한글 같은 OA 툴들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누군가에게 지식을 가르쳐준다는 것이 뿌듯했고, 저의 재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나모웹에디터

초등학교 6학년 때 막내 동생이 태어나면서 저희 가족은 월세이긴 했지만, 제 방과 여동생 방이 있는 낡은 주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는 뭔가 경제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셨나 봅니다. 슈퍼마켓을 그만두고 식당을 차리겠다고 한식/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누가 옆에서 부추겼는지,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알뜰살뜰 모은 돈을 모두 쏟아부어 지인과 함께 대출을 받아 주물 공장을 차리셨습니다.

이때쯤 아버지가 컴퓨터를 새로 장만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조립 컴퓨터를 구매하면 여러 가지 게임을 설치해주는 것이 정석처럼 되어 있었는데, 이때 '녹스', '디아블로'와 같은 게임들을 많이 설치해줬고 여러 게임들을 즐겁게 하다가 우연히 설치되어 있던 '나모웹에디터'를 열게 되었습니다. 집이 로켓처럼 날아가는 아이콘이어서 '롤러코스터 타이쿤' 같은 게임인 줄 알고 열었는데, 이게 저의 인생을 또 한 번 뒤바꿔 놓을 줄은 몰랐죠.

이게 뭘까 한참 살펴보다 홈페이지 제작에 사용되는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이퍼링크 기능을 통해 이 페이지 저 페이지 옮겨 다니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밤새 웹페이지를 만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접속해보라고 IP 주소를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만든 웹페이지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저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기분에 밤잠 설쳐가며 매일매일이 설렜습니다.


위험한 호기심

중학교 1학년 때는 아파치로 웹서버를 만들고 게임/영화를 공유하는 '와레즈'를 만들어서 운영하며 광고비를 벌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법 자료공유여서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방문자가 늘어나는일이 즐거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저 제가 만든 웹사이트에 사람들이 접속하고, 제가 올린 자료를 다운로드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광고비가 들어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로 시작했던 일이었죠.

이것이 소문이 나서 컴퓨터 선생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 2학년 때는 영재로 발탁되어 영재교육원을 수료하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에 대한 저의 재능을 인정받고, 더 깊이 있는 지식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의 미래는 탄탄대로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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