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 경기대회에서의 좌절
부산 컴퓨터과학고등학교는 제게는 '국,영,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멋진 핑계를 제공 해 주었습니다. '대회반' 을 운영 했거든요. 동아리반 선생님들은 정말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셨어요. '좋아 하는 일' 에 대한 열정을 놓치않도록 갖은방법으로 학생들을 독려하고 이끌어 주셨죠.
그 덕에 온갖 대회를 다니며 수많은 상을 모았습니다. 정말.. 우물안 개구리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저의 그런 자만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007년, 부산컴퓨터과학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저는 기능경기대회라는 큰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3등안에 들면 전국으로, 또 전국에서 3등안에 들면 국제올림픽으로 이어지는 큰 규모의 대회였죠.
이 대회는 2일 동안 하루 8시간씩 네트워크가 끊어진 컴퓨터실에서 시험 주제가 나오면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디자인, 프론트엔드, 백엔드를 모두 해결해야 하는, 그야말로 실력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무시무시한 대회였습니다.
대회 첫날, 늦잠을 자서 3시간이나 지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담당 선생님께 등짝을 세게 맞았지만, 그때까지도 저는 제가 최고인 줄 알았으니까요. 둘째 날에는 2시간 넘게 남은 채로 작업을 끝내고 당당하게 대회장을 나왔습니다. 자만이 하늘을 찔렀던 거죠. 담당 선생님은 대회장으로 다시 돌아가 점검하라며 엄청 혼내셨지만, 저는 오류가 하나도 없다고 큰소리치며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그리고 4월 초, 결과가 나왔습니다. 4등. 3등 안에 들어야 전국 대회를 거쳐 국제 대회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4등이라는 결과는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 2학년 동안 금상, 대상만 20개가 넘게 휩쓸었던 저에게 4등은 생전 처음 겪는 실패였죠. 콧대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에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담임선생님께 문자가 왔습니다.
"우진아, 우수상이어도 너무 잘한 거야. 선생님이 알아봤는데, 개발은 문제가 없고 디자인 점수가 좀 낮았다고 하더라. 괜찮지? 마음 추스르고 천천히 학교로 와."
'왜 혼내지 않지?' 문자메세지를 받고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일주일이나 학교를 오지않는 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위로만 건네셨죠.
한참이 지나 마음을 추스르고 가만히 이런저러 생각을 해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공학은 1+1=2가 항상 성립하지만, 디자인은 1+1=1이 되기도 하고 0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요. 감각적인 부분에서의 제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음먹었습니다. "디자인만큼은 최소한 내가 전공자들의 교육 과정을 따라가야겠다." 이 결심이 저의 인생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 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디자인과에 가기로 마음먹고 알아보니 '발상과 표현'이라는 실기 시험을 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림 그리는 실기 시험인지도 모르고, 그저 좀 배우면 되는 필기시험인 줄 알았죠. 네이버에 '발상과 표현'을 검색해보니 집 가까이 '그린섬'이라는 미술학원이 그런 거 전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다지 멀지 않아서 곧장 학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멋진 강사용 핑크색 앞치마를 입은 부원장님을 처음 만나 상담을 했습니다. "시각 디자인과 가서 웹디자인 하고 싶은데요"라고 말씀드렸죠. 부원장님은 너무 잘 왔다며 대학 진학과 여러 가지를 안내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학원비를 알려주시는데, 2007년 당시 38만 원인가요? 배달 알바로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비싼 금액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께 처음으로 사교육에 대한 부탁을 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대학을 가야겠다. 학비는 일단 대학에 가서 생각해볼 테니 학원만 좀 지원해줘. 한 3개월 다니면 될 거야" 라구요. 어머니께서는 뜻밖에도 신용카드를 꺼내주시며 흔쾌히 지원해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대와 헌신이 담긴 학원비를 헛되이 쓸 수 없었습니다. 이 때는 완전히 배달을 그만두어야 했어요.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실기실에 처음 올라갔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맙소사, 4B 연필과 지우개를 주더니 선을 그으라는 겁니다. 가로로 샥샥.. 세로로 샥샥.. 투시도 배우고 육면체 그리는법도 배우고, '원기둥'과 '구'도 배우고 수채화도, 포스터물감도, 파스텔도 차근차근 배워나갔지만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저에게는 너무나 막막한 시작이었죠.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미술학원 생활은 끝나지 않았고, 늘어나는 재료비도 감당이 힘들어 결국 어머니를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냐고 학원에 따지기도 하셨지만, 결국 무리해서라도 이 과정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입시 미술'이라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학원에서는 저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너는 입시 미술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 빠르면 중학교, 늦어도 고1, 2때에는 시작해야 하는데 이제 기초반이 막 끝났기 때문에 재수는 각오해야 한다." 왜 처음 시작할 때 그런 얘기를 안 해줬는지, 입시 미술이 뭔지에 대한 설명을 안 해줬는지 따졌지만,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재수를 하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입시반은 수능이 끝나고 정시 기간 동안 본격적인 입시 준비가 시작되는데,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도시락을 먹으면서 그림만 그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원에 불만이 많았던 제게 입시반 전임 선생님께서 학원 열쇠를 복사해주셨습니다. 수업 시작 전에 스케치를 미리 해놓으면 검사를 해주겠다고요.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아버지가 공장 에 나가실 때 아버지 트럭을 타고 어머니가 싸주신 무식하게 큰 보온병에 밥을 가득 눌러담고 김치와 계란말이가 조금 올라가있는 그런 도시락을 들고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학원에 저를 내려주고 출근하셨죠. 약 3시간 반 동안 스케치를 4~5장 미리 그려두고,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까지 남아 검사받은 스케치 중 하나를 골라 수채화, 파스텔 등으로 채색하는 연습을 한 뒤 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생활을 입시 기간 3개월 내내 반복했습니다.
어릴 때 고도비만이었던 저는 이때 저체중까지 살이 빠졌습니다. 키 181cm에 몸무게가 60kg까지 내려갔으니, 온몸이 바짝 마르고 손과 팔에는 파스텔과 물감 독이 올라 피부가 다 뒤집어지는 등 난리도 아니었죠. 그래도 꿋꿋이 버텼고, 몇 년간 준비한 친구들이 재수 준비에 들어갈 때 저는 당당히 디자인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지켜보신 전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제가 다녔던 미술학원에서 군대에 가기 전까지 멋진 강사용 핑크색 앞치마를 입게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