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카르텔' 속에 안주하려는 학계의 지적 태만을 경계함
'사실’(fact)을 사랑합니다. 삼류였지만 기자를 했기 때문인지 사실에서 어긋난 글은 읽기 힘듭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수사로 꾸민 미문이어도, 사실과 다르면 바로 던져버립니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한 강연이 추천됐습니다. ‘고대 근동’(近東 near east)에 대한 강연이었습니다. 대학 신입생 때, 고대 근동사에 관심을 갖게 돼서 학교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근(近) 40년 전 추억.
강연을 들었습니다. 아뿔싸, 강연 초입부터 숨이 막혔습니다. ‘근동’이라는 개념이 러시아에서 만든 것이라고 아주 태연스레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니, 이 분이 세계사를 다시 쓰려는 것인가?’
제가 알기로, ‘근동’, 그리고 ‘극동’(far east)은 영국이 러시아를 경계하면서 탄생한 개념입니다.
부동항을 원했기에, 19세기 들어 러시아는 세계 곳곳에서 ‘남진’했고, 그때마다 영국은 러시아를 막았습니다. 19세기 중엽 크림반도에서 벌어진 크림전쟁이나, 1885~1887년 조선 땅인 전라도 거문도를 영국이 불법 점령했던 것도 모두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 그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관련이 있습니다. 크림전쟁이 ‘근동’에서의 러시아 남하를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라면, 영국의 거문도 불법 점령은 ‘극동’(far east)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남하와 관련된 일입니다.
19세기 들어 왜 영국이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의 남진을 그리도 막으려 했는지 무식한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유럽 통일을 ‘본토 유럽’에서 막은 유일한 나라가 러시아였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니다. ‘선진국’과 ‘군사 강국’(그것이 지리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을지라도.)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근동이라는 개념이 러시아에서 탄생해 퍼진 것이라고요?
강연이 오른 사이트에 바로 물었습니다. ‘근동이 러시아에서 탄생했다는 근거를 알려주었으면 한다’고요. 누군가가 ‘강연자에게 물어본 뒤 답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어젯밤, 강연자를 통해 전해진 답은 정말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다니엘 스넬이라는 미국학자가 쓴 ‘The ancient near east: The basics’라는 책의 한 구절을 캡춰해서 보낸 것이 전부였습니다.(스넬은 스탠포트 졸업(1971년) 예일대 박사(1975년) 출신으로, 현재 오클라호마대 명예교수입니다.)
근거가 되는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근동이라는 개념은 아마도(probably) 러시아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전거도 전혀 없고, 다른 근거조차도 전혀 없이 ‘아마도’라는 한 단어만으로 ‘근동은 러시아에서 탄생했다’고 스넬은 이야기한 셈입니다.
스넬은 숱한 근동사 관련 저작을 낸 학자입니다. 전문가임에도, ‘근동’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그는 아무리 봐도 오해를 한 듯 합니다.
학자들이 ‘정확성에 대해 항상 의심하는’ 위키피디아 영어판을 보십시오. 근동에 대한 배경이 아주 상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Near_East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근동’이라는 말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왜 그 말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에 대해 역사적 외교적 배경까지 찬찬히 그리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적 학자일지라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덜렁 ‘근동은 아마도 러시아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이야기는 것과, 필부필부들이 만든 사전일지언정 ‘문헌적 전거’까지 제시하면서 근동의 탄생 배경을 이야기한 것 중 무엇을,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기자 출신이어서인지는 모르지만, 학자들의 이야기 중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었습니다.
‘신문기사나 인터넷에 오른 글은 믿지 말라’
예, 맞습니다. 전문적 학자의 글보다야 신문기사나 인터넷의 글이 신뢰성이 떨어질 겁니다. 그렇다고 전문적 학자의 글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찾는 것이 중요하고요.
그래서 물었던 겁니다. 근동이라는 말의 탄생 배경에 대해.
한데 근동사를 전공했다는 이들의 설명이, 그것도 세계적 학자까지 끼어든 설명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키피디아 영어판보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통적으로 키에프나 모스크바를 중심지역으로 삼은 러시아 입장에서, 우리가 ‘근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 혹은 남동쪽에 있는 땅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리가 근동이라고 일컬은 지역을 ‘근남’(近南 NEAR SOUTH)이라고 불렀을 공산이 더 큽니다. 그들의 목적은 ‘남쪽 나라 따듯한 부동항 확보’였으니까요.
게다가 위키피디아 영어판은 ‘근동’이라는 표현이 언제 등장했는지 문헌으로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데 스넬이라는 세계적 학자는 ‘아마도’라는 추정을 의미하는 부사 하나로 러시아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요.
저는 이해불가입니다. ‘근동’이라는 말의 탄생 배경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근동에 대한 책을 내고 강연을 하나요?
최소한 제가 지적한 강연의 연사 역시 ‘근동’이라는 말의 탄생 배경에 대해 위키피디아 영어판만 읽어봤어도 ‘스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을 파악했을 겁니다.
위키피디아 영어판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필부필부의 주장이 모인 글이나 말을 무조건 따르라는 게 아닙니다.
위키피디아 영어판의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으면서, ‘위키피디아 영어판은 어중이떠중이들의 놀이터일 뿐이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일개 학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학계의 습관’은 고치자는 겁니다. 더 나아가, 아니 본질적으로 말해서, ‘학자들 혹은 전공자들만의 카르텔이 최고여’라고 자위하면서 지적 태만에 안주하는 자세는 버리자는 겁니다. 진리는 사회적 명예나 권력에 있지 않고, 사실에 있습니다.
노파심에서 말합니다. 이는 제가 언급한 해당 강연의 연사에게 드리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분을 전혀 알지 못하니까요.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그분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만 18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우리 학계의 ‘지적 습관’ 중 나쁘게 보았던 것에 대해 던지는 고언입니다.
전공을 오래 한 이들의 말이나 글이 ‘맞을 확률’이 높은 것이지,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실관계를 더 치열하게 찾아야지요. 전문가들 눈에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말이나 글을 무조건 배격할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글이 더 옳고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면 전문가의 신뢰는 더 높아질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신뢰성이 확보되지 못했다면, 소위 ‘전문가 집단’에 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술지에 오른 글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조건 배격하지는 말자는 겁니다. ‘옳으면 장땡’ 아닌가요?
왜 위키피디아 영어판이 논문에서 인용문으로 표시될 수 없나요? 질 떨어져 보인다고요? 예를 들어, ‘근동’이라는 용어에 대한 탄생 배경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학자보다는 위키피디아 영어판이 훨씬 나아 보이는데요? 그러니, 위키피디아 영어판 등 ‘필부필부의 말이나 글’을 인용했다고 욕하지 말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부터 제대로 판단해보시라는 겁니다. 그게 과학적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아니 하버드대 천체물리학과 교수가 천동설을 이야기하면 믿지 않을 겁니다. 대신, 우리 옆집에 사는 무학(無學)의 김씨 아저씨가 지동설을 이야기하면 믿을 것이고요.
그 누구도 그렇겠지만, 저는 사실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