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수명 증가와 직업 선택, 그리고 정시 확대
의대 광풍 현상은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광풍이 날로 거세지기는 하지만....
그 광풍이 의대를 넘어,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로까지 넘어간 지도 꽤 오래입니다. 그래서 대학입시에서는 이들 학과를 ‘의치한약수’라고 부릅니다.
광풍의 일차적 이유는 이들 직업이 ‘입력 대비 출력 비율’이 높아서입니다. 사람 생각, 다 거기서 거기이지요. 100원 투자해서 10원 버는 것과 15원 버는 것을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듯.
여기에 두 가지 요소를 더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① 평균 수명의 증가
제가 대입 학력고사를 준비하던 1983년, 인문지리 시간에 배운 한국인 평균 수명은 65세 정도였습니다. 남자는 63세, 여자는 66세 정도였지요. 당시 피고용인 정년은 대부분 직종에서 60세였습니다.(교사는 65세) 은퇴하면, 남자의 경우, 노후 준비고 뭐고가 필요 없이 한 3년 즐기다가 죽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2021년 기준, 대한민국 평균 수명은 83.6세입니다. 사기업에서 ‘천행’(!)으로 정년퇴직한다고 해도 대개 60세입니다. 은퇴 뒤 24년 가까운 시간이 남은 것입니다. 게다가 평균 수명은 의학의 발달로 더 길어질 것이고요.
어느 명문대를 나와서 한창때 잘 나아갔다고 한들, 퇴직 뒤 월급은 ‘그놈이 그놈’ 수준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자녀 결혼까지도 ‘일정 부분’은 부모 몫입니다. 정년퇴직 뒤에도 ‘들어갈 돈’은 만만치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연금을 포함해도 벌이는 확 줄었으니, 제아무리 서울대 공대 자연대를 나온들 이런 압박감에서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한데 의치한약수는 ‘면허를 가진 자영업자’입니다. 건강만 하다면, 80세에도 일할 수 있습니다. 남(고용주) 눈치 보지 않고 말입니다.
서울대 공대 자연대를 졸업한 이들이 자기 딸 아들이 공부 잘하면 공대나 자연대를 안 보내고 의치한약수를 보내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② 대입 정시 확대
조국 전 장관의 따님 입시 비리는 대입 정시 비율 확대를 낳았습니다. 2015학년도 서울대 정시 비율은 20%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40%입니다. 입시 공정성 요구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수용한 것이었지요.
수능 성적으로만 대입을 결정하면 ‘결과 자체는 공정’합니다. 한데 ‘숨은 맥락’이 있습니다. 수능은 어릴 적부터 수능에 맞게 ‘양질의 사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기는(혹은 이기기 쉬운) 구조입니다.
의심된다면, 수능 지역별 성적을 비교해 보십시오. 지금은 ‘지역 간 격차를 너무 노골화시킨다’는 우려 때문에 공개하지 않지만, 2010년대 초중반까지는 종종 국회의원을 통해 공개되곤 했습니다. 서울 강남구가 압도적인 탑이었습니다. 장담하건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수능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최소한, ‘덜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성적이 될만하다 싶으면 재수 삼수에 바로 도전하는 것이지요.
수시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요, 지방 어느 산골이나 섬마을 학생이 서울대를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수시 학생부 교과’(고교 내신 성적을 위주로 신입생을 뽑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양질의 사교육을 밤 10시까지 받은 ‘대치동 학생’을 어느 농촌이나 산골, 섬마을 학생, 혹은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부모를 둔 학생이 수능 점수로 이기기는 거의 힘듭니다.
없애야 할 것은 ‘이 스펙, 저 스펙’ 요구하면서 내신 외 요소를 반영하는 ‘수시 학생부 종합’이나, 사교육이 아니면 제대로 받기 힘든 ‘논술’입니다.(어느 학교인들 논술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학생부 종합 선발에서 자기소개서(준말 ‘자소서’)를 요구했을 때, 그조차 사교육 컨설턴트가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일부 학생은 자소서를 ‘자소설’(스스로 쓴 소설)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리학 공부만 하다가,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밀려서 나라가 망한 조선이 요즘 자꾸 떠오릅니다. 그 자리를 이제는 의대가 차지했다고 저는 봅니다. ‘의대 망국론’이지요. 수학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과 공학이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19세기 조선으로 바로 치달을 겁니다.
아쉬운 것은 과거제의 직계 후배로 볼 수밖에 없는 ‘사시파’가 핵심인 현 정부에서 과학 분야 연구비를 줄였다는 겁니다. 현 정부의 변함없는 지지자이지만,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평균 수명은 늘어나서 은퇴 뒤 걱정도 힘든데, 그나마 있던 지원마저 줄어든다면, 누가 수학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자연대와 공대를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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