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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형준 Nov 01. 2023

<11월 첫날 새벽의 꿈>

대부분 꿈은 깨자마자 잊힙니다. 11월 첫날, 새벽 2시가 안 돼 깼는데, 꿈이 너무도 선명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기자였습니다. 초년병 시절의. 근무처는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주간조선. 토요일이었습니다.      

한 번도 같은 부서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은 분(제가 수습 기자일 때 두 달 일한 적은 있음)이 꿈속에서 데스크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토요일임에도 기사를 두 건 취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제가 막내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주간조선은 부서 소속 기자의 원고 마감이 금요일이었습니다. 토요일 취재는 아주 급한 것이 아니고는 없었습니다. 외부 원고를 포함한 최종 마감은 월요일이었고요.     


한데, 토요일에 두 건의 취재 지시라니. 싫어하는 티를 냈습니다. 그분은 무척이나 화를 내셨습니다.(실제로, 그분은 화를 대놓고 내는 분이 아니었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면서 '하, 왜 이리 힘드나' 생각하는데, 꿈에서 깼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쯤.     


기자를 그만둔 지 만으로조차 15년이 됐습니다.      


기자 생활 대부분을 문화재 기자로 지내면서, 때론 구역질이 날 정도의 국수성 때문에 '이 짓거리를 왜 해야 하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기자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 숭상해야 할 터. 한데 제가 쓰는 글, 아니 ‘써야 하는 글’은 사실과 엇나갈 때가 많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자는 독자에게 ‘시대의 생각’을 ‘전달’하는 역할이 주된 것이므로. 기자는 기본적으로, 아니 운명적으로 ‘창작자’가 아니므로...     


문화재 전문가들의 주장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중국 대륙이 남북조로 분열됐던 시절 동북아시아 4강 국가였다는 고구려.(그런데 왜 남북조에 그리도 조공했나요?)      


석굴암에 구현됐다는 엄밀한 수학적 비례미.(1960년대 후반, 문화재관리국이 발간한 석굴암 중수 보고서에 담긴 실측치라도 보세요. 거기에 무슨 엄밀한 수학적 비례미가 있는지.)     


석가탑에 넣은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석가탑을 최초로 세운 서기 8세기에 간행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11세기에 있었던 지진 때문에 일부 무너진 석가탑을 수리하면서,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다시 만들어 넣었다는 석가탑 중수기 기록은 아예 무시.)     


조선 후기 영정조 때 맞았다는 르네상스나, 조선 후기 자생적 자본주의의 싹을 꺾은 외세.(도대체 무엇을 ‘재생’시킨 것이기에 르네상스라고 부르나요? 조선 후기 자생적 자본주의의 싹은 또 뭐였고요? 상업과 유통이 발달하면 다 자본주의의 맹아? 그런 식이면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삼은 로마도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군요.)   

  

기자를 그만두면서 ‘앞으로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다고 자부하고 있고요.      


한데, 퇴직 뒤 15년이 지나도록 꿈에서조차 기자 짓거리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노라니...     

도대체 이 꿈의 정체는 뭔가요? 마음 한구석에 그래도 기자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히 남은 건가요? 아니면, 불가역적인 젊음에 대한 남상댐인가요? (물론 저는 여전히 젊지만, 그럼에도 ‘지금보다 더 젊었던 시절’이 부럽고 그립습니다.)    

  

대부분 깨면 잊는 게 꿈임에도, 게다가 비할 바 없는 개꿈임에도, 오늘 것은 너무도 선명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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