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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형준 Dec 20. 2023

공부량으로만 본 1980년대와 현재 대학 입학 난이도

1980년대 수험생이, 어느 요즘 수험생의 분노에 찬 글을 보면서

지독히도 갈등 요소가 많은 나라입니다. 지역 갈등, 계층 갈등, 여남 갈등, 세대 갈등, 여기에 남북 대치까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저는 봅니다.      


세계은행 21년 통계 기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1 제곱킬로미터 당’ 인구밀도 세계 평균은 61명입니다. 한데 대한민국은 530명이네요.      


https://data.worldbank.org/indicator/EN.POP.DNST     


인구 많다고 소문난 중국이 150명, 미국 36명, 일본 345명인데요. OECD 국가 중 우리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출산율 감소, 인구 감소 우려로 나라가 난리 아우성이죠?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 모든 게 ‘자연선택 과정’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천혜의 자원을 가진 것도 아닌데, 세계 평균보다 9배 가까운 인구밀도가 가당하다고 보시나요? 케이쥐 안에 쥐가 너무 많으면 결국 쥐끼리 먹고 먹힙니다. 그 어떤 대책이 나와도, 인구밀도는 당분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저는 봅니다. 그게 자연법칙이기도 하고요.     


어느 수험생 사이트를 보니 분노에 찬 글 하나가 보였습니다.      


‘요즘 (수험생 수가 줄어서) 대학 가기가 쉽다고 하는데 꼬우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실, 대학 가기는 앞으로 더욱 쉬워질 것이라고 봅니다. 수험생은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대학을 나온 이후의 삶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한 가지 이야기할 것은. 과연 대학 가기까지의 ‘과정’이 쉬워졌는가입니다.      


시계를 잠시 40여 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80년 7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은 과외 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서슬 퍼런 군부 통치 시절이었지요. 자식이 과외를 하다가 걸리면 공직자의 경우, 공직을 떠나야 했지요.      


저요? 행복 그 자체. 사교육을 받을 형편도 못 됐는데, 과외가 금지됐으니 할렐루야였지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오후 3시 50분 정도면 수업을 마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 2 때까지는 수업 마친 뒤 학교 도서관에서 2~3시간 정도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와 밥 먹고 놀았던 것이 제 일상이었습니다.      


매달 있던 국영수 중심의 월례고사는 평소 실력으로 시험 쳤고, 한 학기에 두 번 있는 중간-기말고사 때는 3주 전부터 공부하는 게 그나마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의 태도였지요.      


중간-기말고사로만 평가하는 내신을 대입에 반영했지만, 실질 반영률은 미미했습니다. 15등급으로 내신을 나눴는데, 내신 한 등급 당 차이가 대학에 따라 2.5~2.6점 정도였습니다. 학력고사는 340점 만점이었고요.      


즉, 3년 내내 딴 내신 한 등급 간 차이가 학력고사 1점짜리 3문제보다 못한 셈이었습니다.(당시 수학 빼고는 한 문제당 무조건 1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내신이 뭐 5등급 6등급이 아닌 이상, 학과 차이가 날지언정 서울대 가는데 내신 때문에 못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모든 게 학력고사 ‘한 방’으로 결정되던 시절이었지요.      

당시는, 공부 좀 한다는 학생조차 고 2 겨울방학이 돼서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방학 때,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관악에 진학한 저조차 고 2 겨울방학 전까지는 시험 때가 아닐 경우 많아야 하루 3시간 공부가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자발적인 공부’였기에 효율은 ‘강제적인 학원 학습’보다는 높았을 겁니다.     


아해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교사가 된 15학번.     


아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사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냥 집에서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해서 관악에 갔으니까.     


허걱. 아해 성적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사교육을 시켰습니다. 이후 아해의 삶은 제 눈으로는 피폐 그 자체. 초등학교 때 이미 밤 8시 정도에 학원에서 돌아오더니, 중학생이 되면서 오후 10시 귀가.      


인구밀도가 X 같이 높은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렇게 공부해야 하는구나.     


고 2, 고 3에 ‘해당하는’(아해는 검정고시 출신입니다.) 2013년, 2014년에 아해가 보인 노력은 제게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그 나이 때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으니까.     


당시 아해에게 진심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네가 그 어느 대학을 가든, 아니 대학을 못 가더라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존중할 것이다. 네가 보인 노력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     


요즘도 지인 늦둥이들의 입시 상담을 하는데... 요즘 학생들이 공부에 들인 노력을 보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1981~1983년에 고등학교를 다닌 제가 들인 노력으로 24 수능을 본다면? 절대로 ‘인 서울’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언제부터 입시가 이리도 지옥도로 변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여튼, 1980년대는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하고 낭만적이었습니다. 대학 가는 경쟁률 자체는 우리 때가 높을지 모르지만(84학번 학력고사 수험생은 66만8000명 정도였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90만이 넘었지요.), 공부량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1980년대에 대학에 가서, 졸업과 동시에 아무런 고민 없이 몇몇 직업을 제외하고는 ‘골라 골라’ 수준으로 취업할 수 있었던 우리 세대는 정말로 천운을 타고났던 세대였습니다.      


 추신.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마사회에서 취업 알림이 학과에 왔습니다. 누군가 마사회 취업 이야기를 하자 어느 놈 왈, “야, 마사회 가서 뭐 하냐? 말똥 치울 거여?” 지금 마사회 가려면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할까요?     


일례 하나 더. 1989년 봄, 당시 안기부(현재 국정원)에서 저희 집에 편지와 전화까지 했습니다.      


“귀하의 자제를 안기부에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부지는 너무도 좋아하시면서(국가 기관에서 ‘귀하 아들을 우리 기관으로 보내달라’고 먼저 청한 것이니...) 전화로 그리 대답하셨다지요.      


“아들이 신문기자가 되려고 해요. 그래서 안 간다네요.”     


“아이고, 선생님. 안기부에도 언론 기관이 있습니다.(당시 북한 문제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내외통신’이라는 언론사가 사실상 안기부의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지금 국정원 가려면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하나요? 저의 경우처럼, 일개 대학생에게 먼저 ‘영입 의사’를 밝히기도 하나요?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은 몇백 년 전의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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