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별로인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늘 주변에 불평이다. 운전할 때마다 생각한다. ‘나를 앞질러 가는 저 차는 왜 저렇게 운전하는 걸까?’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 사고가 날 뻔했다. 완벽한 사각지대였기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나를 째려보는 차주를 똑같이 째려보았다. 택배 상자를 집 앞에 조금 세게 던져놓고 가는 택배 직원을 불러 따졌다. 결국 말싸움으로 이어졌다. ‘세상에는 엉망인 사람투성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당당할까?’ 늘 가지는 의문이다.
불평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다. 사실 지인에겐 더 심해진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갑자기 당일에 약속을 잡는 친구를 속으로 한껏 욕하면서 터덜터덜 약속 장소로 걸어 나간다. 본인도 흠 없지는 않은 인생이면서 제일 친한 친구가 잘못할 때면 쥐잡듯이 친구를 나무란다. 친구는 가끔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배구를 할 때면 화가 더 많아지는데 나만 잘하고 주변은 꼭 다 못하는 것 같다. 실수할 때면 눈으로 흘겨볼 때도 있고 직접 이야기할 때도 있다. 그렇게 주변 사람 기를 죽여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세상에서 꼭 나만 잘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아직도 곁에 남은 사람들은 정말 세상 좋은 사람이거나 목적을 가진 사람들 뿐일지도 모른다. 웃기게도 그렇게 주변 사람을 괴롭혀놓고 집에 가서 반성하긴 한다. 스스로 자책하며 다음부터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문제는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 타고난 기질인 걸까? 고칠 의지도 없으면서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정말 때려죽여도 시원치 못할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뉴스만 봐도 그렇다. 미담보다는 부덕한 사건들만 잔뜩 나온다. 뉴스를 보다 보면 그런 일들이 일상처럼 느껴져 자연스레 감정 없는 눈으로 정보를 읽어 나갈 뿐이다. 사실 나는 주변 사람의 슬픔에는 크게 공감하면서 관계없는 사람의 고통에는 무덤덤하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굶어 죽어 나간다는 유니세프의 광고 같은 걸 볼 때도 동태눈인 걸 보면 꼭 그렇다.
그렇기에 내가 이해한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때려죽일 만한 사람은 없다. 이성적으로는 몇몇 있겠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감정을 느낄 만한 사람들 속에서 굳이 때려죽일 사람을 찾자면 어쩌면 그건 바로 나일 것이다. 세상 가장 잘난 척, 우아한 척 하면서 사실 가장 인내심 없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주변에서 베푸는 친절을 떠받들어준다 여기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을 사람이다.
누군가 며칠을 전전긍긍하다 용기 내서 한 고백은 그저 골칫거리로 여겨지고, 주변 사람들의 칭찬은 당연히 내가 받아 마땅한 내용으로 여긴다. 그러다 누군가 핀잔이라도 주면 100분 토론이라도 할 기세로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 애쓴다.
스스로만 잘난 줄 알아서 떠나는 사람들에게 크게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특별하게도 애정이 가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다 그런 사람들마저 지쳐 떠나갈 때면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못 보았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게 된다. 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말투를 가진 그들의 눈은 항상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늘 상대에게 진심으로 대하며 교감하고 그 안에서 바른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롭지 않아 보였다.
그에 비해 나는 뭘까? 날 바라봐주는 다른 사람의 눈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시선은 오직 나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리고 늘 외로워했다. 최근 몇차례 겪은 이별이 꼭 그런 행태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취미가 우선이고 그 나머지에 인연을 끼우려 하고 있었다.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지.’라는 대단한 철학과 고집으로 살아오며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해왔다.
위처럼 한 번씩 깨달음이 올 때면 자기혐오가 한없이 커지곤 했다.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자아가 붕괴하기 직전까지 이른다. 티가 날 정도로 한없이 불안해지고 위태로워질 때가 되면 가장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가 내 감정을 한 톨도 남김없이 털어놓는다. 그리고 곁에 머물러주기를 뻔뻔하게 요구한다. 어쩌면 가장 나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을 그 친구는 진심을 담아 나를 위로해준다. 그리고 기꺼이 곁에서 머물러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시 안정을 찾아가곤 했다.
매일 자기 전에 기도를 시도한다. 시도라고 표현한 이유는 기도를 끝마치기 전에 잠에 드는 순간이 많아 기도를 완성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의 처음 내용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인데 그 안에 내 소망은 전혀 담지 않으려 애썼다. 순수하게 타인의 행복만 빌어왔다. 일말의 양심은 있기에 스스로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면 그동안 내가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얼마나 허무할 것일지 알고 있다.
이러한 기도 루틴이 며칠 전부터 바뀌었다. 기도 내용에 나의 소망도 담아 기도하려 애쓴다. 생각해보면 가진 게 많을지도 모른 삶이다. 그러면서 늘 불행하다고 여겨왔다. 욕심이 끝이 없나 보다. 뻔뻔한 걸 알면서도 내 욕심에 맞추어 더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일 같이 기도해주는 가족과 우리 친할머니의 마음을 의식하고 나서다. 친할머니께서는 3일만 전화가 되지 않아도 내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걱정하신다. ‘심근경색’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큰아버지를 한순간에 잃고 나서 전화에 예민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퉁명스럽게 대하곤 했다. 어느새 백발이 무성해진 우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음 편한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다. 오늘도 뻔뻔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기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