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하는 법
계단에서 넘어질 때 혹은 길에서 노래 부르다 사람을 마주칠 때처럼 살아가다 보면 부끄러운 순간들이 생긴다. 최근엔 글을 쓰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글을 쓰다 보면 내 무의식 속 생각과 언어 습관이 고스란히 담기는 것 같았다. 글을 완성하고 다시 읽어보면 나의 평소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거울을 보고 있나 하는 착각도 들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예상보다 더 초라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기에 꽤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인 것 같다.’로 맺는 문장이 몇 차례 보였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지 왜 자꾸 애매하게 표현할까 답답해하면서도 그런 태도가 곧 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위축된 사람이다. 너무 당연한 질문에도 틀릴까 무서워 손을 들지 않는다. 무대 행사에 당첨되어도 비웃음을 살까 무서워 무대에 서지 않는다. 사람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눈이 바코드처럼 나를 스캔하는 것 같아 애써 시선을 피하려고 한다.
아마 이 위축감은 나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감정일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에서 하위 비교 대상이 되었던 경험, 용기 내었으나 비웃음을 산 경험들이 쌓이며 나의 열등감을 조금씩 키워나갔을 것이다. 보통의 부정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기 마련인데 이 위축감만큼은 회복이 유독 더디다. 타인의 비난에는 격하게 긍정하면서도 타인의 칭찬은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위축된 마음이 더 강해지기 전에 벗어나 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었다. 부족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척 약하지만 약하지 않은 척 위장해보기도 했고, 나의 부족함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태도는 까치발 같은 것이었다. 다리를 올릴 때는 잠시나마 내가 높아 보이겠지만 다리가 지치면 금방 발을 내리고 말 것이고 이내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 허무한 패턴에 질릴 즈음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동안 부정하기 바빴던 위축된 나의 모습들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달리기가 빨라 육상대회에 나갔던 나, 춤을 못 추어서 망신을 샀었던 나, 인사성이 좋아서 어른들이 예뻐했던 나, 발표만 하면 떨려서 발표를 망치는 나를 분리하지 않고 같은 방에 넣어두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은 더 솔직하고 뻔뻔해져야 했다. 누군가의 칭찬에 조금은 재수 없게 우쭐대보기도 하고 민망한 상황에도 가볍게 넘어가 보려 했다. 질투나면 질투난다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가식 없는 태도가 편안함을 주었을지, 더 선명해진 찌질함이 본인의 찌질함과 동화되어 위로를 받았을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친구들은 전보다 나를 더 좋아해주었다.
물론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위축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나보다 잘난 사람에게 질투하고 부족한 나를 보며 우울할 때도 많다. 그럴 때면 ‘발표를 못하는 나이기에 나의 발표에 용기를 갖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에게 효용성을 부여하며 매일 조금씩 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