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은 여섯 살부터다.
동생과 장난감을 땅에 묻으며 놀았고,
일곱 살,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못해 꼴찌를 했다.
아빠가 그런 나를 보며 응원했다.
사람들은 세 살, 네 살의 기억도 있다던데,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할까?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도,
본격적인 내 기억의 시작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다.
엄마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다섯 아이를 키우며 받는 스트레스를
자녀에게 그대로 쏟아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약 2년 동안,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내게 풀었다.
그 기억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엄마인데 왜 저럴까.’
엄마가 계모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혹시 내가 밖에서 데려온 자식은 아닐까.
엄마는 안 그러는데,
나는 이미 상처받은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복수하듯 굴었다.
황달에 걸려 오랜 시간 병원을 들락거렸고,
고등학생 때는 교실에서 쓰러졌고,
엄마 마음 아프게 하겠다는 오기로 사흘씩 밥을 먹지 않았다.
엄마의 애달픔을 보며 복수는 성공한 듯했지만,
결국 남은 건 스트레스성 위경련과 만성 위염이었다.
그저 나 자신의 몸만 망가뜨렸다.
스물여섯에 결혼하고, 그 이듬해 아이를 낳았다.
엄마는 산후조리를 해준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나와 연년생인 여동생의 8개월 아기를 돌보고 계신 걸 알았지만 서운했다.
나는 언니 집에서 이틀을 지내다 다시 집으로 왔다.
당시엔 동네에 산후조리원도 없었다.
그때의 서운함은 오랜 시간 나를 따라다녔고,
제대로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 10년을 아팠다.
뼈가 시리고, 삭신이 쑤셨다.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희미해진 건
마흔이 넘어서였다.
그 감정에 나를 더는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나를 다독이며
단단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서운함이 있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
누릴 것들이 많은데
서운함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싶지는 않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자녀에게 감정을 푸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ㄷㅎ이에게 80점짜리 엄마는 되지 않을까?
물론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