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별로 친하지 않은)친구가 새 차를 샀다. 반질반질 새까만 윤이 나는 명품카인데, 나는 그 애의 첫 차의 첫 시승자로 당첨됐다. 오후 4시면 아이를 하원해야 하는 터라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첫 시승자가 된다는 게 왠지 꺼림직해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그 애는 기어이 집 앞으로 나를 모시러 왔다. 굳이.
“와따마. 너 승긍(성공)했다마.”
차는 진짜 좋았다. 아직 비닐도 뜯지 않는 새 차라서 새 차 냄새로 가득했지만 내가 또 언제 이런 차를 타보겠나 싶어 입으로 숨을 쉬어가며 꾹 참았다. 벨도 없다.
‘한 시간이면 되겠지.’
30분 쯤 지났을까. 줄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드라이브 좀 한 다음 아이를 픽업할 요량으로 편하게 입고 나온다는 게 하필 줄무늬 추리닝 세트였다. 이 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으로 통일까지 했다. 친구에게 부끄러운 기색을 들키기 싫어 최대한 평온하게 대했다. 누가 봐도 어색해보였을 태연한 척 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민망하다. 괜히 그랬다. 그냥 나처럼 할 걸.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고, 나는 굳이 데려다주겠다는 그 친구의 차를 또 벨도 없이 탔다. 자존심 따위 개나 주지 뭐. 그 친구의 차는 여전히 비닐에 덮힌 채 페인트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과연 그 차는 자기가 비닐에 덮여 숨이 막히고 있다는 걸 알까. 친구가 차를 아끼는 건지, 혹사시키는 건지 모를 일이다.
"18!!"
초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툭 하고 튀어 나오자 그 친구는 다짜고자 욕을 했다. 아이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마음과 자기 차에 기스라도 날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반반씩 섞여 나온 찰진 욕이었다. 아이도, 나도 당황했는데 정작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아했다. 오히려 속 시원해보였다.
사람이 차를 아끼는 것만큼 사람을 아끼면 얼마나 좋을까. 이토록 차에 친절한 사람들이 사람에겐 친절하지 않다는 게 이상하다. 그 친구가 자기 차를 타고 느꼈을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멋진 차를 타는 만큼 말도 고급스럽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고급 가죽으로 치장한 차를 탄다고 운전자가 명품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뚜벅이다. 가족들이 함께 쓰는 차가 있기는 하지만 가족 내 서열 꼴지인 내가 차를 쓸 수 있는 날은 별로 없다. 각설하고, 20대 때는 카메라며 노트북이며 온갖 장비를 들쳐 메고 취재를 다녔을 정도로 혈기 왕성했다. 오대양 육대주를 횡단하고도 끄떡없을 무다리를 물려받아 다행이다. 걸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참말로 다행이다. 나는 걔가 무슨 차를 타든 부럽지 않다. 하나도 부럽지 않다.
에라잇, 걔는 왜 자꾸 나를 타라고 한거야? 그리고 왜 들으라는 듯이 욕을 해댄 거야? 생각하면 또 열받는다. 얼음 한조각 넣은 뜨거운 차나 마셔야지. 이 차나 그 차나 차는 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