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옷장에 분홍이 쌓이는 이유
임신 16주, 내 뱃속의 아기가 딸이라는 은근한 암시를 받았다. 그날부터였나. 너에게 분홍색 옷을 함부로 사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나는 분홍색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교직생활을 하며, 책상에 걸린 가방들을 볼 때마다 들었던 묘한 거부감. 남자아이들은 죄다 파란색, 여자 아이들은 죄다 분홍색. 왜 저럴까? 란 고민 없이, 그저 색으로 나뉘는 성별에 대한 불편함이 나를 눌렀다. 그 막연한 불편함으로 만들어낸 스스로와의 약속은 아이를 낳아 기르니 처참히 깨지기 시작했다.
슬쩍 아이의 옷장을 쳐다본다. 한 옷 걸러 한 옷이 분홍색이다.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딸아이의 옷장에 분홍 옷이 많아지는 이유야 여러 가지 겠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 셋을 뽑아본다.
첫 번째, 선물을 받아서.
나는 옷을 선물하면서도 노랑이나 크림 같은 중성적인 색깔을 사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의외로 유아동복 매장에 가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성별에 따라 제작된 옷들이 많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성별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남자아이면 파랑이나 초록색 옷, 여자아이면 분홍색이나 빨간색 옷을 사게 되는 수순 이리라. 받는 선물마다 분홍색 옷. 웃긴 게 또 막상 입히면 화사하니 예쁘다. 일단, 예쁘니 입히게 된다.
두 번째, 아이나 부모가 좋아해서.
"저는 분홍색이 좋아요!" 우리 반 어떤 여자아이의 말이 이렇듯, 색깔도 결국은 취향이다. 분홍색 옷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뜻을 받아들여 사준 옷일 수도 있고, 부모가 좋아서 사 준 옷일 수도 있다. 아무튼, 누군가의 기호가 반영된 옷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입어야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니 글쎄 의외로 분홍색이 되게 화사하니 예쁘다니까?
세 번째, 여자 아이라는 걸 티 내고 싶어서.
내가 이 세 번째에 해당된다. 통한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중성적인 내 얼굴을 많이 닮아서 일까, 내 딸아이는 제법 중성적이게 생겼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아들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처음에는 딸이라고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이제는 그 질문이 꽤나 따갑다. 내 눈에는 하염없이 딸로 보이는데, 아들처럼 생겼나? 아무렇지 않으려고 해도 괜히 날 닮아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핀을 꽂아줘도 아들이냐고, 심지어 분홍색 옷을 입혀도 아들이냐고. 오늘은 남편이 아이에게 원피스를 입히면서도 이런 말을 할 지경이니 말 다했다. "원피스 입혔는데, 아들이냐고 물어보는 사람 없겠지?" 그래서 조금씩 사기 시작했다. 분홍색의 아이템들.
하하. 길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딸이에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아들이면, 딸만큼 예쁘장한 아들이 되고, 딸이라면 진짜 딸이 되는 거니까. 성별이 무어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남녀가 갈린 역사는 제법 길고 하다못해 식물도 암수가 나뉘어 있는데, 여자로 태어난 내 아이가 왜 아들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느냐고 되물어 보고는 싶은 맘이다. 아무튼 오늘은 원피스를 입혀나간 덕분이었을까. 그녀는 꽤 '여자 아기'같아 보였다. 이런 편협하기 짝이 없는 내 마음이 간혹 뼈 저리게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