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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달 May 22. 2021

아빠와 미나리

간만에 제대로 된 영화감상을!

일주일 전, 아이가 지독하게도 낮잠을 자지 않았다. 남편은 이렇게 된 김에 밤잠이나 일찍 재우고 영화나 한 편 보자며 나를 꾀었다. 아이의 뉴런이 엄마 아빠의 것과 닿았는지, 다행히도 일찍 잠들었다. 아이를 낳은 지 무려 18개월 만에 우리 부부는 문화라는 걸 향유했다. 오래간만에 느낀 문화의 향은 치킨 냄새만큼이나 황홀했다. 거기다가 시원한 맥주 한 캔까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밤이구나.


영화 미나리. 누군가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은 아니라고 까내리던데, 나는 그냥 잘 봤다. 밤과 술에 취해,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했던 영화. 어디서나 끈질기게 자란다는 미나리처럼, 영화 속의 가족은 끈질기게 버틸 것이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우리 아빠에게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 영화 속 미스터리처럼 우리 아빠도 농부다. 무려 13년 차 농부. 여름이면 통통하던 뱃살이 쏘옥 빠지고, 겨울이 되면 추운 날씨를 차곡차곡 배에 쌓아 느긋하게 봄을 기다리는 사람.


지난주, 어버이날.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는 남편 덕에 엄마의 입에 날개가 달렸다. 이야기는 어느덧 처음 농사를 지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로 넘어가 있었다. 농사는 물이 중요하다. 물이 너무 많아도, 물이 너무 없어도, 물이 가득 차올라도, 그렇다고 물이 죄다 빠져나가도 안 되는 물의 마법. 분명 부모님이 처음 빌렸던 토지는 물이 잘 차지 않고, 배수가 잘 된다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단다. 봄서부터 열심히 길렀던 상추는 장마에 물폭탄을 맞았다. 아빠의 말을 빌리면, '뽀오드를 타도 될 정도'로 물이 넘실거렸다고. 결국 그 해 여름 길렀던 상추는 모두 죽었다.


"너희 아빠 그렇게 다리에 힘 풀려서 주저앉는 건 처음 봤어."


그 이후로도 번번이 농사는 망했다. 중간중간 잘 됐던 날들도 있었지만, 부모님에게는 빚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부모님이 농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경제력이 가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어도, 불행을 막을 수 있다던 말. 우리 가족, 특히 엄마는 돈이 없어서 자주 불행했다.


불행하다고 농사를 놓을 수는 없었다. 하던 식당이 줄줄이 망해서 시작한 농사였으니, 흙밭의 비닐하우스가 최후의 보루였다. 어떤 해는 비가 안 와서, 어떤 계절에는 시중에 작물이 너무 많아서, 어떤 날에는 약을 너무 많이 줘서 허탕을 쳤다. 그래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여러 실패로, 우리 부모님과 가장 잘 맞는 작물을 찾았고, 그 작물을 실수 없이 잘 길러낼 수 있는 루틴도 만들었으며, 덕분에 올 해는 대파 값이 아주 잘 나와서 전에 없던 돈벼락까지 맞았으니까.


"농산물센터 가면, 너희 아빠 대파부터 경매를 해. 물건이 가장 좋고, 가장 비싸니까. 너희 아빠 대파만 사는 사람들도 있어서, 꼭 넣어달라고 전화까지 온다니까?"


엄마의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아빠는 요즘 일할 맛이 난다며,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는 싱글벙글했다. 이 상황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우리 부모님의 삶은 전보다 훨씬 나아 있었다. 미나리처럼. 꾸역꾸역 모진 땅에서 살아온 삶이었다.




예전에는 참 미나리를 싫어했다. 특히 초등학생 때, 급식에 나온 미나리를 안 먹는다고 선생님께 혼이 나서 억지로 먹었다가 구역질이 올라와 죽는 줄 알았다. 그 향이 불쾌했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조림에도 넣어 먹고, 샤부샤부에도 넣어 먹고. 건강에 좋은 게 맛도 향도 좋다며 '미나리미나리 원더풀미나리' 한다. 부모님의 삶은 미나리에 대한 나의 추억과 비슷한 궤도를 그린다. 지금은 그래도 원더풀.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미래는 어떨지 모른다. 하지만 아빠와 나의 턱은 각지고 넙데데하다. 엄마는 이런 턱을 가진 사람이 말년운이 좋다고 했다. 관상학과 엄마를 믿어보기로 했다. 일단 엄마 얘기는 다 맞다는 걸 나이가 들 수록 느끼니까. 그리고 아빠의 말년이 좋아야 비슷한 턱을 가진 내 말년도 좋을 테니까.  


원더풀최사장.

그 불길을 걸으면서도, 나와 동생을 등에 엎고 오래도록 버텨준 그에게 감히 엄지를 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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