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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달 May 28. 2021

전화기 너머의 비상구 소리

벚꽃의 꽃말은,

대학생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다. 벚꽃이 피는 아름다운 춘삼월, 흐드러진 벚꽃을 볼 여유도 없이 중간고사 시험을 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을 교직에 빗대어 표현해볼 수 있겠다. 벚꽃의 꽃말은 바로 학부모 상담이라고. 



4월, 대부분의 학교가 이맘때쯤 학부모 상담을 시작한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이주일. 학부모 상담 신청서를 각 가정으로 보내면 학부모님들께서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선택해서 보내주시는 시스템. 담임교사는 그 신청서를 다 받아서, 타임테이블을 짜고, 다시 알려드리고, 날짜를 확정하는 방식이다. 상담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20분에서 30분 정도. 내 아이의 학교생활이 궁금한 엄마의 달뜬 목소리와 담임선생님의 지치고도 친절한 목소리가 한 데 뒤섞인다. 


재미있는 현상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상담을 원하는 학부모님들의 숫자가 팍팍 줄어간다는 것이다. 1, 2학년 때는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이 신청하신다. 손에 쥐기도 여린 몸을 가진 내 아이가, 초등학교라는 거친 풍파를 겪어나가는데 혹여 어려움은 없을까, 그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꾹꾹 담은 작은 종이가 학교에 속속 도착한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의 신뢰도 함께 자라난다. 앞서 큰 문제없었으니, 아이가 잘 해내리라는 마음. 어느 순간부터, 학부모님들은 아이 가방 속에서 발견한 상담 신청서를 조용히 재활용함에 넣게 된다. 


담임교사들 입장에서는 이 행동이 전혀 서운하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정말' 잘한다. 제 나이에 맞게 잘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사회는 어른들의 사회만큼이나 질서 정연하게 잘도 흐른다. 정말로, 정말로! 그러니 우리 아이에게 특이사항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상담 굳이 안 하셔도 된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올해 내가 맡은 아이들은 2학년. 23명의 학부모님들 중 22명의 학부모님들이 상담을 신청해주셨다. 죽음의 상담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많게는 하루에 6명까지, 일과시간 이후에 집에 가서도 상담은 계속되었다. 그 마음 백번 이해하기에, 틈틈이 물로 목을 축여가며 아이의 학교생활이 아주 훌륭함을 설명드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마음속 그 갈증 감히 해결되지 않았으리라고. 



그러다 어떤 학부모님이 유독 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저렇게 소리가 울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아, 그곳. 비상구 계단이었다. 이미 기초조사서로 맞벌이를 하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후 3시면 한참 일을 하실 시간이었으니, 중간에 잠깐 계단으로 나와 상담전화를 받으시는 것이리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선생님." "다행이네요, 선생님." "친구들과는 잘 지내나요?" "공부는 잘 따라오나요?" 묻는 학부모님의 어떤 마음이 무형의 전파를 타고 흘러왔다. 내 핸드폰으로, 내 귀로, 끝끝내 마음으로. 


엄마가 되고 나서 좋은 점은, 학부모님들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 1년 차 새내기 담임교사일 시절, 한 학부모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선생님이 아이를 낳아보신 적이 없으셔서 잘 모르실 텐데.." 그때는 그냥 무례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틀린 말씀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잘 모르고 있었다. 


무엇을? 비단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은 나와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언제나 아이들 뒤에 서서 너른 품을 내어주고 있는 학모님들이 함께 있다는 것. 그들과 나는 결국 교육공동체라는 그것을. 교육공동체. 말은 어렵지만 결국은 아주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아이를 잘 키워내기 위해, 우리 함께 연대하고 함께 희생하자는 약속. 오늘도 반성이라는 칼날로, 오롯이 내 마음에 그 약속을 다시 한번 세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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