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자의 스승 되기'라는 이상

by 얼렁뚱땅 도덕쌤

이분법의 한계와 위험성을 잘 알면서도 종종 이분법을 사용하곤 한다. 때론 의식적으로, 때론 나도 모르게.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세상의 모든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 후, 같은 부류로 묶인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에는 흐린 눈을 하곤 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 버릇을 완전히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어제, 이제는 어른이 된 제자 최를 만나서 이런 말을 했다. 2022년에 내가 19살 최에게 했던 그 많은 실수들에는 공통된 근본 원인이 있다고. 나와 최는 다른 사람인데,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했다고. 그래서 내 삶의 방식을 최에게 강요했다고. 그 말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다시 말해 본다. 2022년에 내가 19살 최에게 했던 그 많은 실수들에는 공통된 근본 원인이 있었다. 나와 최는 다른 이상을 쫓는 이상주의자였는데, 나는 우리가 같은 이상을 쫓는 이상주의자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나의 이상을 최에게 강요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세상 사람들을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둘로 나누고, 세상 모든 이상주의자가 나와 같은 이상을 쫓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농담을 좋아하면서도 그랬다.


'진보'라는 단어는 걸어나간다는 뜻이다. 사람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나간다면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일직선이 아니고 3차원이기 때문이다. 모두 저마다의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진보는 계속 분열한다. 나는 이 농담을 19살,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부터 좋아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계속해서 나뉘었다 합쳐지는 역사를 도식으로 그리면서,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고 외우기 어렵다고 투덜거렸다. 아마도 그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의 독립을 꿈꿨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다른 곳으로 걸어나갔겠지.


이상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각자의 이상을 향해 걸어나간다.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어제 최와 어향가지를 먹으면서 이제서야 겨우 깨달았다. 최의 이상을, 최가 꿈꾸는 미래를, 기대되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 길에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이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잠깐 같은 단체를 만들었다 또 흩어지는 것처럼.


"선생님의 꿈은 너무 멀어요. 그 꿈을 향해서 걸어가다가 지금은 자동차를 만드는 중이니까 뭔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신도 나겠지만, 선생님의 꿈에는 자동차를 타고도 도착할 수 없어요." 2022년. 최는 비판적인 의도로 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칭찬으로 들렸다. "네가 생각하는 내 꿈이 뭔데? 자사고에서 철학수업하기?" "뭐... 그런 거요."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나는 내 꿈에 도착하지 못해도 괜찮아. 자동차가 고장나서 다시 걸어가도 괜찮아. 내가 걷다가 중간에 늙어 죽으면, 거기서부터 림이 이어서 걷겠지. 나의 뻔뻔함에 최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도 비슷한 대화를 하다가 최가 말했다. "선생님 또 '림이 이어서 하겠지~' 이럴 거죠." 나의 책임감 부족을 비판하는 투였고, 나는 엄청 신나하면서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 이상에 도달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상주의자다. 림이 이어서 하겠지. 반면 최는 꼭 최의 이상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무척 다르고, 림은 이어서 할지 몰라도 최는 절대로 나를 이어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림도 이어서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림에게는 림의 이상이 있을 테니까. 그것도 그것대로 신나는 일이다.


림에게 어깨를 내어주기 위해서 열심히 나의 키를 키우고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림은 발이 1000개쯤 되는 사람이라, 나 말고도 999명의 어깨를 밟고 서서 세상을 볼 것이다. 1000개의 서로 다른 이상 위에서 림만의 이상을 키워가겠지. 그럼 최는? 최는 발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나의 어깨를 밟지 않을 사람이다. 그래도 내가 최의 발 아래에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놓아줄 수 있다면, 그것이 나에겐 평생의 자랑이자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런 스승이 되는 것이 나의 이상이고 꿈이다. 자동차를 타고도 도착하지 못할, 아주 멀고 크고 위대하고 굉장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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