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모든 것 (하)

왜 섞여야 하는

by 비읍비읍

우리는 왜 섞여야 하는가


직업의 세계는 점점 더 뾰족해지고 있다. 내 브런치 글인 '직업의 모든 것(상)'에서 우리가 왜 서로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직업은 말로 설명되지 않고, 같은 단어를 써도 각자가 떠올리는 세계는 다르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단순하다. 각자가 속한 직업의 세계가 점점 더 멀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되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아는 시대는 이미 끝났지만 각자는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정교한 언어를 쓰게 되었고, 동시에 '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었다. 뾰족해진다는 것은 한 분야에서 강해진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다른 분야와는 동떨어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식은 원에서 선으로, 선에서 점으로 이동한다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의 설명이 기억이 난다. 그는 칠판에 커다란 원 하나를 그리며 말했다. 이 원이 인간이 알고 있는 전체 지식이라고 가정해보자고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은 이 원을 넓히는 과정이고, 고등학교부터는 특정 방향으로 선이 튀어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원에 진학할수록, 원과 더 먼쪽으로 선은 더 뾰족하게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박사라는 것은, 그 원의 경계를 넘어서는 존재라고 덧붙였다.


이 비유는 직관적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선이 점이 될수록, 그 점은 원의 다른 부분과 점점 멀어진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은 명확해지지만, 다른 지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게 되는것이다. 전문성은 이렇게 다른 분야에 대한 시야를 좁히는 대가를 요구한다.



뾰족함은 혼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공계 박사 출신들이 산업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한 설명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경영자나 투자자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술의 타당성과 시장에서의 설득력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내가 아는 한 기술평가기관의 평가자는 기계공학 박사였다. 그의 명함에는 분명히 전공이 적혀 있었지만, 그가 실제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기술을 더 깊이 연구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거래소와 상장주관사의 시각을 먼저 파악하고, 그들이 어떤 질문을 던질지를 예상한 뒤, 기술의 강점을 그 언어에 맞게 다시 배열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기술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술을 경영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 사례는 뾰족함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향으로만 향할 때 얼마나 쉽게 고립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전문성은 혼자서는 온전히 기능하지 않는다. 연결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그래서 번역자의 자리가 생긴다


문과 출신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는 늘 반복된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숫자에 약하다, 실체가 없다는 말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다른 가능성을 본다. 문과의 진짜 자산은 지식의 깊이라기보다 언어의 배열 방식에 있다. 문과는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데 필요한 감각을 상대적으로 많이 훈련받아왔다.


기술을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시장이나 조직의 언어로 다시 전달하는 역할. 이 과정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번역에 가깝다. 그리고 이 번역 능력은 전문성이 뾰족해질수록 더 중요해진다. 모두가 각자의 언어로만 말하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그 언어들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계가 아니라 기회일 수도 있는 지점이 온것이다.




직업은 결국 태도와 언어로 드러난다


여러 직업의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일하다 보니, 직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무슨 일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먼저 따지고, 어떤 사람은 그 결정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먼저 고민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기준도, 중요하게 여기는 순서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언어도 서로 다르다.


최근 대통령이 기업과의 간담회때 기업과 공무원들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는 지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고객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언어를 기본값으로 삼고, 행정은 공급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정리해왔다라고 말이다. 이 차이는 능력의 우열이라기보다는 출발점의 차이에 가깝다. 어디에서 문제를 보기 시작했느냐, 어떤 책임을 전제로 사고해왔느냐의 차이다.


VC와 빅테크 기업 창업자, PE와 신약개발 회사를 이끄는 대표이사, 은행과 중소기업 사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숫자를 먼저 보는 사람과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 구조를 중시하는 사람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은 같은 데이터를 놓고도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누가 옳은지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직업은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태도는 말과 판단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 사람이 어떤 직업적 환경 속에서 시간을 보내왔는지가, 생각보다 훨씬 깊게 언어에 배어 나온다.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내려오면, 직업은 각자가 선택한 생존 방식에 가깝다. 누군가는 조직 안에서 안정성을 택하고, 누군가는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창업을 선택한다. 누군가는 월급이라는 구조 안에서 리스크를 관리하고, 누군가는 스스로 리스크를 떠안는 대신 더 큰 자유를 선택한다.


이 모든 선택의 밑바닥에는 “이 시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 직업은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다. 그래서 직업이 바뀌면 삶의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 단순히 하는 일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섞여야 한다.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왜 섞여야 하는가. 답은 거창하지 않다. 섞이지 않으면 각자의 뾰족함이 서로를 찌르기만 하기 때문이다. 연결되지 않은 전문성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불필요한 갈등을 만든다.


섞인다는 것은 서로의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상대가 어떤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만으로도 대화의 방향은 달라진다.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상황은 줄어든다.


이 두 편의 글은 직업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능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다양해진 직업군에 전문성까지 갖춘 뾰족함으로 각자 멀찍이 떨어진 섬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직업은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직업의 차이는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식 위에서 우리는 조금 더 덜 오해하고, 조금 더 잘 섞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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