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8888, 유턴 그리고 완성

수집에 끝에서 나는 무엇을 만났는가

by 비읍비읍


이제 남은 숫자는 한개. 8888이다. 찾으려고 강하게 열망하다보니 더욱 안찾아진다. 괜히 지하철역 1 정거장 전에 내려서 길을 걸으며 도로위 차량들의 번호판을 스캔한다. 잘 안가던 골목길로 들어가서 혹시나 8888이 주차되있지는 않을까- 하고 두리번 거렸다. 이렇게 한달을 지냈는데도 발견하지 못하니 애가 타기 시작한다. 당근마켓 같은곳에 이렇게 올릴까 생각도 해봤다.


'차량번호 8888이신분 사진찍게 해주시면 만원드려요'


아니면, 차량번호판을 관리하는 정부의 어느 기관을 통해서 8888 차량의 등록주소지가 어딘지 확인하면 어떨까 싶었다. 앞에 세자리에 가운데 오/모/허 이런식으로 한글들도 들어가니 뒷자리 8888은 엄청나게 많을텐데 말이다.


로지컬 씽킹을 해보쟈면,

1) 앞에 숫자 세자리를 사용하니까 000이나 100 999 같은 특수해보이는 숫자들을 감안하면 약 900개가 된다.

2) 가~하 중 받침없는 글자 위주로 사용하고 극단적으로 다양성을 보여주지는 않는것 같았으니, 약 50자 수준.

3) 가능한 조합수는 900 x 50 = 45,000개 정도가 된다.

4) 특정 앞자리 숫자는 행정/공공/특수 용도로 제한되고 있으며 8888의 희소성을 관리(?)하기 위해 추첨/경매 식으로 부여되는걸 가정할때, 약 10%가 실사용된다고 가정하면 약 5천대가 된다.


근데 왜 안보이지. 참 신기하다.

로지컬 씽킹을 더 나아가보자면, 어떤 사람들(또는 사업자)가 8888이라는 차량번호를 배정받기를 원할까? 웃돈을 심하게 얹더라도 이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누굴까 싶었다. 번뜩 중국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한국에서 차량을 소유할때 해당 번호를 가지고 싶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중국에서는 8이라는 숫자를 한자로 적었을때 확산하듯 퍼지는 모양새라서 '길'하다고 믿고 있으니 8888만큼 멋진 숫자가 또 어디있겠는가?!


중국인 부자들이 사는 동네나,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곳에 가보자. 일단 제주도를 다시 점검하러 가볼 필요가 있겠다.




2024년 7월에 두 번째로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친구들이 아닌 가족과 함께였다.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고 아내. 여행 마지막날 아침 우리 넷은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이번에는… 8888을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대는 점점 잊혀지고 있었다.


두 번이나 제주에 왔고, 지금까지 일곱 개의 숫자를 모았다. 마지막 퍼즐인 8888은 왠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만 남았다. 무언가 불가침의 영역처럼 느껴졌던 숫자가 되버렸다. 나는 이미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 순간.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는 한 대의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실루엣, 반짝이는 실버톤,


그리고 그 번호판.

ChatGPT Image 2025년 5월 29일 오후 04_29_05.png


8888.


정말?
진짜 맞나?
내가 지금 본 게 맞아?

나는 뇌를 스캔하듯 순간을 되짚었다.

맞다. 8888이었다.
가장 마지막 남은 숫자.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그 번호였다. 심장이 요동치고 운전대 위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크루즈 모드도 아닌데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핸드폰을 꺼낼 수 있을까? 하는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머리속을 뒤덮었다. 한창 다른 이야기 중인 와이프에게 얼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라고 함성을 질러야하는건지 고민했다. 뒷좌석에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저… 지금 좀 이상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저 앞에서 본 차량 있죠? 그게 8888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몇 달 동안 모으고 있던 번호판 중 마지막 퍼즐이에요.”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장모님은 “번호판?” 하고 되물었고,
아내는 피식 웃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한 5분 정도 늦어질 수도 있는데… 제가 잠깐 유턴해서 그 차를 따라가서 사진을 찍고 와도 될까요?”

정적이 흘렀다.


그건 아마, 이 말이 워낙 뜬금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리둥절해하시긴 했지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흔쾌히 응해주셔서 나는 운전대를 틀어 유턴을 감행했다.


이건 상징적인 움직임이었다. 내가 만든 미친 프로젝트의 결말을 향해 돌아가는 몸짓. 반대차선을 달리며 차량을 추적했다. 운 좋게도 그 차는 얼마 가지 않아 관광지 앞에 정차해 있었다. 그리고 내 예측은 정확했다. 중국인 VIP 관광객을 태운 대형 벤 차량.

.

로지컬 씽킹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숫자 8.. ‘팔’은 한자로 쓰면 기운이 퍼져나가는 모양... 그래서 복을 의미함..


이건 그냥 번호가 아니었다. 한 문화의 기호이자, 내 프로젝트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각도를 바꿔가며 몇 장을 남겼고, 확실하게 기록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비로소 숨을 돌렸다.


‘됐다.’
‘이제 끝났다.’


그때 나는 이상한 정적 속에 서 있었다. 목적을 이루었지만 어딘가 조금 허무했다. 다 모아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잠시 멍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수집이 완성되었다.

2023년 9월 9999 마이바흐로 시작해,
2024년 7월 8888 벤 차량으로 끝났다.




그 후 서울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회사 주차장에서 너무나도 쉽게, 떡하니 주차되어 있는 8888 차량을 보게 되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유턴까지 했지?’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수집이 끝났다는 증거였다. 8888은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다. 의심, 예측, 집착, 그리고 결정적인 실행. 그 모든 단계를 밟은 유일한 숫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은 언제나 가장 어렵지만, 가장 짜릿하다.


수집이 끝나자, 이상하게도 번호판이 더 잘 보였다. 어쩌면 이제는 찾기 위해 보는 게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보는 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여정은 숫자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내 집착을, 내 기쁨을 모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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