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진 상태가 비교적 길게 계속되는 일’을 의미한다. 2~3주 정도만 반짝 대응하는 대학 중간·기말고사와는 다르게, 행정고시는 수험생에게 장기간의 레이스를 요구한다. 그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달리기만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많은 수험생들은 슬럼프를 겪기 마련이고, 처음에는 활활 불타올랐던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슬럼프를 어떻게 이겨내는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반대로 극복이 지체된다면, 정말 크게 시간 낭비를 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슬럼프를 대처하는 팁’에 대해 다룬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슬럼프에 잘 대처하지는 못한’ 어떤 수험생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이를 통해, 오늘도 달리느라 지쳐 있을 수험생을 비롯한 많은 현대인들을 위로하고 싶다.
나는 3년 4개월의 수험 기간 중 크게 세 번의 슬럼프를 겪었다. 이 중 어떤 것은 그럭저럭 잘 넘겼으나, 다른 하나는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하마터면 고시 공부 전체를 끝장낼 정도로 치명적일 뻔했다.
나는 첫 2차 시험을 친 직후부터 슬럼프를 겪기 시작했다. 나는 고시 진입 당시 ‘반드시 첫 해에 합격하겠다’라는 상당히 큰 포부를 갖고 있었다. 소망이 너무 컸던 탓일까? 막상 시험장에서 풀지 못한 문제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거 없이 결과를 낙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3달 뒤 2차 시험 발표가 났다(행정고시는 2차 시험을 치른 뒤 그 결과 발표가 비교적 늦게 나는 편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그것도 무려, ‘평균 10점 차이’였다(이것은 엄청난 간극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시 나는 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충격 때문인지, 한동안 슬럼프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그 외에 2차 시험을 치르느라 4개월 간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생긴 신체적·정신적 번아웃, 복학해서 고시 공부 외에 학교 공부까지도 대응해야 했던 것 또한 큰 원인이었다(무려 18~21학점을 신청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4~6개월 간 고시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늘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데’라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막상 슬럼프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이 슬럼프는 학교 학기가 마무리되고, 이제 이대로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극도로 강해지고 나서야 잦아들게 된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결국 다음 두 번째 2차 시험에서도 마찬가지로 평균 10점 차로 광탈하는 등, 성장은 한동안 거의 멈추게 된다.
만약 이때 정신을 붙잡고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아쉬운 시기 중 하나이다.
한창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국이었다. 덕분에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식당, 목욕탕 등은 제한되었으며, 기맥정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갈 곳을 잃은 나는 집(고시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첫 3주 정도는 집공부도 의외로 괜찮았으나, 아무래도 편안한 공간인 탓인지, 갈수록 집중력은 떨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뜬금없게도, 유튜브 영상 ‘Study With Me’*를 촬영하면 공부가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고시 공부 대신 영상 촬영·편집 공부를 하며 10만 원이 넘는 장비(캠)까지 샀다. 지금 보면 일종의 도피성 행동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 공부하는 모습을 LIVE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시청자들도 이에 호응하여 유튜버와 함께 공부하는 것
다행히 이 슬럼프는 딱 3일만 갔다. 그 이유는 별 것 없는데, 유튜브를 찍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 촬영한 뒤, 그냥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 또한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슬럼프의 주원인임을 알고 있었고, 집공부를 하는 대신 스터디카페를 다니기 시작하며 슬럼프는 완화되었다.
내 수험 기간 중 가장 심각했던 슬럼프이다. 첫 번째 슬럼프는 그래도 학교는 다녔으니 핑계가 없지는 않고, 두 번째 슬럼프는 금방 극복해 냈다. 그러나 세 번째 슬럼프 기간 중 나는 ‘한 게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3개월의 슬럼프 기간 동안 고시 문제 1~2개를 푼 것이 전부였다(원래는 하루에도 수십 개 이상의 문제를 푼다).
이 슬럼프는 세 번째 2차 시험을 치른 이후 생겨났다. 실수를 많이 한 탓에 당시의 나는 멘탈이 제대로 나갔었고, 행정고시 대신 다른 진로를 알아보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시 공부 외에 7급, 공기업 등 어떤 공부든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책 앞에서 멍을 때리고, 잠을 자며, 거의 매일 PC방을 향하는 등 공부에 손을 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느 공기업(‘기술보증기금’) 필기에 합격하고, 면접을 준비하며 그곳을 꼭 가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제야, 나는 이 세 번째 슬럼프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엄밀히는 이때도 ‘극복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고시 공부가 아닌 다른 공부를 한 것이니까..
이때 결과적으로 2차 시험을 합격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으면 나는 첫 번째 슬럼프보다 더한 영향을 받을 뻔했다. 어쩌면 인생에서 '행정고시'를 아예 접었을지도 모른다. 슬럼프 기간 중 고시 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2차 시험 합격이라는 결과를 듣게 되다니, 이런 점에서 난 참 운이 좋다.
결과적으로, 나는 슬럼프에 제대로 대처하지는 못했다. 특히 첫 번째, 세 번째 슬럼프는 ‘극복’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사실 ‘슬럼프에 대처하는 자세·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있다. 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슬럼프를 마주한다면, 우선 대중적이고 친근한 동네 카페와 같은 공간으로 공부 환경을 아예 바꿀 것 같다. 그러고도 도저히 극복을 못하겠으면, 차라리 확실하게 놀 것 같다. 아니면 여행을 다녀온다던지. 그리고 복학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슬럼프의 주요 원인의 하나는 학업 병행이었는데, 고시 공부와 학업 공부를 같이 하는 건 사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긴 하다. ‘내 의지는 특별하니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슬럼프 극복 방법은 알 것 같긴 하다. ‘그냥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결국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 일단 책을 펼치고 볼펜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슬럼프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아쉬운 시간들이다. 이때 내가 좀 더 잘 대처했더라면, 합격이 1년 정도는 앞당겨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령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험 기간 중 생기는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알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도 한때 불타오를 땐 그 무엇도 감히 내 의지를 꺾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지치지 않을 것이었고, 학교 공부와 고시 공부 병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시 2차 시험을 치자마자 그다음 해 2차 시험을 위해 다시 달릴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결국 나는 총 세 번, 그중에서도 치명적인 슬럼프를 두 번이나 겪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히려 슬럼프에 약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럼에도 얻은 것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이건 글 쓰면서 새롭게 생각한 건데.. 직장 다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슬럼프가 생기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방법을 강구해 나가야겠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을 너무 몰아넣지는 않는다던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던지, 취미를 가진다던지.
그럼 슬럼프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그 영향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앞으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