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시험은 어렵다. 하지만 2차 시험이야말로 행정고시의 메인이라는 점에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수험 기간 동안 전체 공부 시간의 약 90%~95%를 2차 시험공부에 투자하였다.
2차 시험은 각 직렬별 전공과목(기계공학, 화학공학, 전기공학 등)을 주제로 한 문제들이 출제되며, 대학교 중간·기말고사와 비슷한 유형이라 볼 수 있다. 경쟁률은 약 7:1에 달한다.
동시에 나에게 있어서 2차 시험은 1~3차 시험 중 가장 어렵기도 했다. 1차 시험(PSAT)과 3차 시험(면접)은 전공과는 무관하므로, 비전공자인 나라고 하여 특별히 불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2차 시험은 전공시험이고, 따라서 나는 내 학부 전공이 아닌 기계공학과 과목들을 공부해야 했다.
1차 시험을 치르고 한 달 정도 뒤, 시험 결과 발표 날이었다. 차마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없어서, 나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정말 다행히도, 단 한 문제 차이로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 문자를 받은 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얼굴도 모르는 게임 사람들에게 ‘저 행시 1차 합격했어요’라고 채팅을 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나는 겨우 1차를 붙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달려야 했다. 2차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불과 4달이 채 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2차 시험공부를 시작하였다. 또한 나는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한 학기를 휴학하기로 결정했다. 안 그래도 4달밖에 시간이 없는데, 학교 공부까지 같이 하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휴학이 무슨 대수냐’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나름 큰 결단이었다. 휴학을 한다는 것은, 대학 생활에 있어서 ‘공백’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에는 자기계발을 위해서, 혹은 다른 경험을 쌓기 위해서 휴학을 하는 학우들도 많았지만, 그것이 개인적인 나의 성향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싶었고, 그걸 위해 ‘칼졸업’을 준비해 왔다.
그랬던 내가 휴학을 한 것은, 이제 나의 고시공부가 정말로 시작된 것을 나타내는 신호였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내가 고시공부를 시작한 걸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내가 정말로 고시생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나는 합격할 때까지, 고시를 준비하는 것을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밀로 부쳤다).
나는 1차 시험 기간 중에도 2차 공부를 조금씩 하고는 했다. 부족한 2차 공부를 해서 얼른 합격하고 싶기도 했고, 1차를 붙고 나서야 2차 공부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실장 형은 ‘1차 시험기간 때는 2차 공부하지 말고 1차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집스레 2차 공부를 하였다. 사실은 실장 형의 말이 전략적으로 옳다. 1차 시험에서 떨어지면 2차 시험을 볼 기회조차 사라지고, 그대로 다음 해까지 1년이 텅 비어버리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상술했듯이, 나는 1차 시험에서 단 한 문제 차이로 붙으며 아슬아슬하게 붙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덕분에 조금은 개념을 안 상태에서 2차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남의 전공 공부라 기초개념 익히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고, 시간 부족으로 여러 권의 전공서를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차선책으로 가장 중요한 전공서와 기출문제 위주로 공부하였다. 이 시기 몸이 피곤해서인지 나는 늦잠을 많이 잤고, 덕분에 9시에 진행하는 출석체크를 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또 기본적인 기출문제에서도 번번이 막혔고, 특히 암기과목의 속도가 느려 갑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늘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돌이켜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었지만, 그럼에도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 시기는 첫 1차 시험 준비 때와 더불어 고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한 기간이다. 공부하던 내 모습을 본 실장 형이 나에게 ‘올해 바로 붙을 수도 있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마침내 시간은 다가왔다. 시험은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에서 치르게 되었고, 나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학도 부산에서 나온 나는 사실 그동안 살면서 서울을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수학여행으로 에버랜드에 간 것, 고3 때 서울권 대학 논술시험을 치러 간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서울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상경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내리자마자 사건이 하나 터졌다. KTX에서 막 내려서 대합실로 올라가려는데, 눈앞에서 기다란 봉이 텅 하고 떨어졌다. 내 위치에서 불과 2m 앞이었는데, 조금만 내가 빨리 걸었다면 머리에 맞았을 것이었다. 경찰을 부를까 하다가, 시험 전날인데 괜히 시간을 지체할까 봐 그냥 역사 안내원에게만 말하고 서울역을 빠져나왔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해 운을 다 쓴 것 같다).
이동도 쉽지 않았다. 수십 권의 전공책을 쑤셔 넣느라 굉장히 무거워진 캐리어 2개와 책가방을 겨우 끌고 가느라, 평소 그냥 걷는 것보다 3배는 느리게 움직였다(몇 권만 들고 와도 되긴 하는데, 두고 오자니 너무 불안해서..). 그래도 평길에서 끌고 가는 건 그나마 할 만했는데, 문제는 계단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는 서울역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했고, 결국 땀을 흘리며 그 무거운 캐리어들을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고는 했다.
경제적으로도 부담이었다. 숙소로 선택한 비즈니스호텔 숙박비만 5박 6일간 35만 원이었다. 거기에 교통비와 식비를 합치니, 시험장에 다녀오며 최소 60만 원은 소비했던 것 같다.
왜 지방에서는 시험을 치르지 않을까? 물론 행정고시 2차 시험은 대다수 응시생이 서울권 거주자이고, 응시생의 숫자도 적은 편(30~50명)이긴 하다. 따라서 시험 감독의 효율성을 위해 한 지역에서 진행하자는 논리는 설득력 있고, 그 지역은 대다수 응시생들이 거주하는 서울권으로 결정하자는 논리 또한 타당하다. 그러나 시험 치러 올라오는 여정 자체가 쉽지 않은 지방러의 입장이 녹아 있지는 못했다. 옛날 조선 시대 때,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하던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시험일 첫째 날. 시험장 건물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고, 덕분에 꽤 올라가야만 했다. 무더운 여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시험장 강의실에 도착하였다. 겨우겨우 도착한 대망의 2차 시험장은, 겉보기에는 다른 대학교 중간고사 시험이나, 일반적인 자격증 시험을 치는 곳의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함께 2차 시험을 치는, 즉 경쟁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어떤 기분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험장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 나는, 다른 응시생들이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 궁금하였다.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기 직전, 응시생들이 앉아서 대기하고 감독관들이 문제지를 배부하는 시간이 있다. 약 30분 정도 되는 이 시간 동안, 응시생 긴장 완화를 위해 음악이 나온다. 무슨 음악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시험을 치고 나서도 여운이 남을 정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4일간의 시험 동안, 매일 시험을 치르기 전 음악이 나왔고, 그것은 나를 안정시켜 줌과 동시에 결전을 준비하도록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그 음악을 다운로드하여 듣고는 하는데, 2차 시험을 치르기 직전 긴장해 있던 그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첫 번째 2차 시험의 첫 번째 날, 타종이 울림과 동시에 시험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보통 계산기를 사용하지 않는 암기 과목임에도, 그날은 계산기 사용이 가능하다고 감독관이 말하여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날 나온 시험문제들은, 여태껏 기출과는 상당히 다른, 계산기를 요하는 유형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혹시 몰라 그 부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였고, 소위 ‘불의타’ 문제들을 푸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는 풀어야 할 문제들을 풀지 못했다. 내가 배운 범위 내에서 출제되었으나 난이도는 어려웠고, 나는 끝끝내 답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실망했지만, 그래도 절반의 성과는 거두었다고 생각하며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시험이 끝난 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응시생들 몇몇이 모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응시생끼리 답을 맞혀보는 소리를 듣고 틀린 걸 발견해 멘붕에 빠질까 봐,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빨리 숙소에 돌아가서, 다음 날 치를 과목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5박 6일 동안, 매일 오전 시험을 치르고,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숙소에 돌아와서 다음날 시험공부를 하는 패턴을 반복하였다. 체력적 한계에 부딪힐 뻔하기도 했으나, 시험 직전에 한 글자라도 더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던 나는 휴식이라는 선택지를 차마 고를 수 없었다. 혹시나 피로가 몰려서 다음날 일어나지 못할까 봐, 잠들기 전 알람을 제대로 맞췄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 등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 과목에 대한 시험을 쳤을 때에도, 처음 보는 유형의 문제들이 등장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기초 지식이 부족하였고, 시간이 없어 일반적인 문제 위주로 공부했던 나에게 ‘전형적이지 않은 특이한 유형의 문제들’은 나의 완벽한 상성이었다. 특히 마지막 과목의 마지막 문제는 거의 손을 댈 수조차 없는 문제였다.
마무리가 아쉬웠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첫 2차 시험은 종료되었다. 5박 6일 간 이루어진 2차 시험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굉장한 강행군이었다. 나는 4개월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스퍼트를 달렸으며, 서울에 상경하여 시험에 응시하였다. 나름 운이 좋았던 부분도 있었으나,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하였다. 나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희망과, 풀지 못한 문제에 대한 씁쓸함을 가진 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