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열쇠 드릴게요. 출입문 밑에 열쇠 구멍이 있는데, 이걸로 여시면 돼요.”
실장님이 말했다.
“나중에.. 뭐, 합격하고 나가시거든, 이거 반납하셔야 해요”
‘합격하고..?’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시작하는구나. 몇 년이 걸릴까.
기맥정(부산대학교 공과대학 행정고시반) 중앙에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공지사항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구가 적혀 있다. 거기서 특히, 푸른색 마카로 써진 한 문장이 내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정말일까. 나는 진정, 여기서 ‘합격하고 나갈’ 수 있을까.
2018년 9월 1일부로, 나는 기맥정의 일원이 되었다. 하루에 무려 세 번, 09시와 16시, 21시에 출석 체크를 하였으며, 실장님의 강력한 권유로 불과 몇 달 전 구입한 카시오 계산기를 뒤로 한 채, 고급형 공학용 계산기를 새로 구입하였다. 그렇게, 고시생으로서의 준비를 조금씩 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 입실 면접을 보러 기맥정을 찾아갔을 때 기억이 선하다. 위치 지도를 받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부산대 건설관 근처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기를 20분, 겨우 꽁꽁 숨겨져 있는 기맥정을 찾을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 처음으로 조우한 기맥정은, 바로 옆 건물인 푸른 창문을 가진 새로 지은 통합기계관과는 달리 낡아 있었다. 근처에 있는 ‘길 없음’ 표지판은 기맥정을 더욱 고립시키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에 지어진 신식 통합기계관만 알지, 이런 구석에 웬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내가 바랬던 것은 다름 아닌 기맥정에 있는 고시 관련 자료였다. 행정고시에서는 자료의 유무가 합격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데, 그만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맥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지’를 실장님과의 면접에서 대놓고 물어봤을 정도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 계속 다니던 학교 도서관과 같은 익숙한 공간을 등지고 기맥정에서 공부를 한다는, 본격적인 고시생 생활의 시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든, 처음에는 기맥정에 대한 나의 기대도, 애정도 딱 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런 기맥정은 내게 점차 익숙해져 갔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통합기계관 쪽에 있는, 다른 학생들이 관심도 갖지 않는 쪽길로 갔다. 이제 내 학과 건물인, 조선관 건물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곳으로.
아무래도 부산대에서는 행정고시, 특히 행정고시 중에서도 기술직*의 합격자가 매우 적은 편이다. 내가 들어갔을 때 당시에는, 최근 합격자가 ‘12년에 1명, ‘17년에 1명, 이렇게 총 2명뿐이었을 정도니까. 게다가 국립대학인 부산대는 사립대학(연세대·고려대·한양대 등)에 비해 행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겠다는 의지가 훨씬 약했다.
* 행정고시는 주로 인문·사회과학 계열이 응시하는 행정직과, 주로 자연과학·공과대학 계열이 응시하는 기술직으로 나뉘며, 기맥정에서는 후자의 행정고시를 준비함
그러다 보니, 기맥정에 대한 학교의 지원은 비교적 미약한 편이었다. 기맥정에 있는 프린터는 자주 고장 났으며, 토너를 잘 갈아주지 않아 매번 학교 행정실에 부탁을 해야 했다. 다른 고시반처럼 1차 시험을 합격한다고 해서 주는 장학금은 일절 없었으며, 사실은 지원제도 자체가 없다시피 하였다. 유일한 지원책으로 2차 시험까지 합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30~50만 원의 면접학원 비용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2차 시험까지 합격하는 인원(합격자 인원의 1.3배수에 불과함)은 거의 없었으니, 지원을 실질적으로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장님이 학교 근처에 있는 절에 직접 찾아가서, 사정사정하며 부탁한 지원금으로 1차 시험 강의와 교재를 구입하고는 하였다.
합격자가 잘 나오지 않다 보니, 가장 중요한 2차 시험 관련 자료가 부족하였다. 행정고시 기술직 시험에는 자료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이 부족하다 보니 나는 자료를 구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자료 수집 부분은 따로 글을 쓸 예정). 나와 같은 기계 직렬인 사람이 없어서, 스터디를 구하지 못해 나 혼자 공부해야 하기도 하였다. 반면, 다른 상위권 대학교의 고시반에는 선배들의 합격수기와 자료가 풍부하고, 같은 직렬끼리 스터디도 자주 구성된다고 들었다. 심지어 식사와 기숙사까지도 제공해 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맥정의 인프라는 다른 도서관이나 스터디카페의 그것과는 비교를 불허하였다. 굉장히 넓은 수납공간 덕에, 수십 권의 고시 서적들을 자유롭게 두고 이용할 수 있었다(이게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자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수험공부에 굉장한 메리트였다). 괜찮은 독서실 책상과 상시 가동되는 에어컨·난방기, 거의 무료(1달에 1만 원)인 이용비용에, 하루 24시간 운영되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무엇보다도, 기맥정이라는 고시반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메리트였다. 기맥정이 아니었더라면, 안정된 공부 공간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느라 괜히 공부 외적인 것으로 신경 쓰였을 수 있다. 기맥정은 오직 공부에만 집중하게 해 준 공간이었다. 합격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음에도, 기맥정 건물을 다른 용도로 변경하는 대신 운영을 존치하기로 한 부산대의 결정에도 감사드린다.
사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더라도, 꼭 기맥정과 같은 고시반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진정한 의미로 ‘혼자’ 공부하고도 붙은 분들도 꽤 있다(올해 시험에도,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기맥정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붙으셨다). 그럼에도, 기맥정에 들어가게 되면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고 정보 교류가 가능하며, 얼마 없지만 그럼에도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기맥정의 가치는 위에서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어느 조직이건 사람 간 관계가 스트레스의 가장 큰 요인일 것이며, 기맥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사회성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 여태껏 살아오며 어디에서든 사람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나는, 혹여나 기맥정에서 인간관계 때문에 쓸데없이 걱정이 생겨서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안 그래도 나는 당시 다른 일로 힘들어했고, 기맥정에서는 사람 스트레스를 받지 말기로 결심하였다. 그 방법은 ‘거리 두기’였다. 기맥정 입실 초기, 나는 일부러 다른 기맥정 실원들과 거리를 두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얼마 전에 실장 형과 나눈 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맥정 실원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나에게 1차 시험인 PSAT 교재를 공유해 주거나, 팁을 알려주는 등 알게 모르게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우리는 나중에 1차 시험을 응시한 뒤 시험 얘기를 하면서 조금씩 관계에 물꼬를 틀기 시작했고, 결국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며, 특히 실장 형과는 거의 항상 연락한다.
내가 입실할 당시 10명, 최대 11명까지 달했던 기맥정 실원들은, ‘19년도 1차 시험 합격 결과가 발표되며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나를 포함하여 2~3명이 될 때도 있었으니까. 부산대에서 행정고시 기술직 시험을 거의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 합격자가 굉장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첫 모습과 달리 기맥정은 한산해졌고, 나는 대신 그만큼 기맥정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마 당시 나는 초시생이었던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고시공부를 몇 년에 걸쳐 꽤 했던 상태였기에, 내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더 빨리 나간 것으로 느낀 것이리라.
그렇게 나간 빈자리를, 나의 기맥정 생활 후반부에 새로운 실원들이 채워나갔다. 하지만 이후 나는 본가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는 바람에, 그분들과는 함께 하는 시간이 비교적 적었다. 내 입장에서는, 기맥정 생활 거의 마지막까지 낯익은 초기 멤버들과 공부한 셈이고, 그들이 나의 기맥정의 기억을 채우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종종 기맥정이 생각난다. 기맥정에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실장 형과 대화할 때면, 더욱 그때가 떠오른다.
입실 당시나 지금이나, 기맥정의 풍경은 달라진 게 없다. 낡아서 약간 벌어져 있는 기맥정의 출입문과, 덕분에 그 사이로 들어오는 콩벌레들. 기맥정 앞에 있는 의자와, 수북이 쌓여 있는 현관의 먼지. 기맥정 내부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위치에 똑같이 꽂혀 있는 고시 서적들, 지금도 푸른색으로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문구. 기맥정에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그때로 멈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며, 당장 뭔가 공부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 기억. 그리고 함께 한 기맥정은, 나의 대학생활 후반부가 녹아있는 공간이다. 시험 합격에 대한 압박감 속에서도 기맥정이라는 보금자리 덕분에 나름 잘 지낼 수 있었고, 그것은 기맥정을 나에게 있어 더욱 아련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3주 뒤, 송별회를 하러 기맥정에 간다. 요새는 기맥정 실원들끼리 더욱 친해져서, 기맥정 네이버 카페에도 같이 밥 먹는 모습, 함께 찍은 사진 등의 게시글이 올라오고는 한다. 이제는 행정고시 외에 변리사 준비생도 뽑고, 인원도 10명 정도로 다시 늘었다고 한다. 지난번에 기맥정에 갔을 때는, 내 자리를 변리사를 준비하던 어떤 분이 쓰고 계셨다. 그걸 보니, 내 자리는 어디로 간 걸까 하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예전과 똑같은 듯, 다른 듯, 기맥정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요새 기맥정의 현황이 궁금해진다. 비록 이제는 기맥정에서 공부를 하지는 못 하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사람들과, 또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기맥정의 근황을 물어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