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남편의 딜레마
처음 시댁 식구들을 만났던 날이 기억난다. 남편 조카의 돌잔치 날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예비 시부모님과 형님댁 식구들과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어색함은 있었지만 특별히 어렵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불편하지 않을까 신경 써 주시는 부모님이 감사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 후, 나는 조심스럽게 또 무던하게 시댁 식구들 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한마디 대화에도 신경을 쓰고 명절이나 가족 행사에는 자연스럽게 함께 움직였다. 괜찮게 지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 마음 한편에 남았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는 연말 연휴에 시부모님과 형님 식구들이 신혼집에 방문하셨다. 편하고 오붓하게 쉬는 날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녀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을 부모님 마음도, 그런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은 남편 마음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좋은 마음으로 식사 준비도 하고 모자란 이부자리를 빌려가며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작은방에 부모님 이부자리를 봐 드리던 나에게 형님이 건넨 한마디는 단호했다.
“동서, 이건 아닌 것 같아. 부모님은 부부침대에서 주무셔야지”
순간 나는 잠시 얼어붙었던 것 같다. 화가 났다. 무엇보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나는 그저 형님말에 순응하며 다시 방 정리를 했다.
부모님들은 종종 서울에 있는 형님댁이나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실 때마다, 시댁에서는 늘 자녀들이 직접 차로 모시러 가야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에겐 조금 낯선 문화였다.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자녀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 애쓰셨으니까.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다. 문화가 다를 수 있다고, 가족마다 방식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신 중이었던 어느 날, 아주버님이 내게 전화를 걸러 아무렇지 않게 ‘역에 부모님을 모시러 가라’ 고 말했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몸이 무거운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그걸 배려해 주지 않는 듯했고 그날 느꼈던 낯선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나와 가족을 아끼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을 알기에 나는 더욱더 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참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여러 차례 있고 나서야 알았다. 그럴 때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었어야 했다는 걸. 조용히 참고 넘어간 일들은 내 마음에 작은 불편함으로 계속 남아있었고 때때로 그것은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드러내는 연습을 시작했다. 마음이 불편할 때는 너무 늦지 않게 내 마음을 알아차리려 노력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그때마다 내 감정을 소중히 다루고 잘 이야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마음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나를 표현하는 것이 관계를 더 건강하게 지키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마디 말을 꺼내는 것이 어떤 일 보다도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고 어설펐던 내 작은 시도가 나와 우리의 관계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건, 나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