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내 그림 내가 읽기
누군가 장미 한송이를 그렸다. 누가 봐도 장미다. 그림 아래에는 친절하게도 '이것은 장미다'라고 써놓기까지 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생각은 여기서 멈춘다. 햐, 잘 그렸군. 코 끝에 향기가 느껴질 만큼 생생해, 하고는 더 이상 생각을 확장할 필요가 없다. 장미를 그려놓고 장미라는데 더 말할 필요가 뭐 있겠나!
하지만...
엉뚱하게도 '이것은 장미가 아니다'라고 써놓았다면 어떨까? 이 때부터 사고의 확장이 일어난다. 감상자는 자신부터 의심한다. 내가 뭘 잘못봤나, 숨은 그림처럼 뭔가 감춰져 있는 건 아닐까, 그림에 어떤 상징과 은유가 깃들어 있을까, 등등 온갖 상상을 하며 자세히 관찰한다. 그러나 그림 속에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화면 위에 물감덩이가 칠해진 것임을 확인할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유명해진 명작이 있다. 짐작하신대로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작품이다. 누가 봐도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라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깊이 고심할 수밖에 없다. 마그리트는 관람객을 농락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이 대목에서 관념과 대상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림의 본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오영수의 <요람기>라는 단편을 읽은 적이 있다. 유년시절 작가의 영롱한 추억을 맛깔스런 문장으로 엮어낸 소담스런 글이다. 글의 마지막은 '언젠가 산 너머 무지개를 찾아 떠나려고 벼루다 그만 어른이 되어버렸소.'라고 끝을 맺는다.(기억에 의존한 거라 정확한지는 의문ᆢ?)
무지개는 빛의 반사에 따른 하나의 현상이고 관념일 뿐 실체가 있는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느낀다. 그림도 다르지 않다. 물감의 조합이 빚어낸 현상이지만 실체가 있는 대상이라 무의식 중에 믿고 있다. 장미를 그린 '그림'을 보며 장미라 여기고, 나무를 그린 '그림'을 보고 나무라 여기고, 계곡을 그린 '그림'을 보고 계곡이라 여긴다. 인간의 무의식이 장미라는, 또는 나무라는, 또는 계곡이라는 관념을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이 득세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쯤에서 내 그림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이 그림 ㅡ 화병에 꽂힌 꽃을 보며 묻곤 한다. 이게 무슨 꽃이냐고. 나는 대답한다. '나도 몰라요. 그냥 꽃을 그렸을 뿐이에요.' 꽃이라는 하나의 관념을 그렸으니 무슨 꽃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보는 이가 매화를 상상하든 철쭉을 상상하든 목련을 상상하든 그것은 자유다. 현실의 꽃이 아니기 때문에 무한 상상의 길을 열어놓았다. 금빛화병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저런 화병이 없으니 황금을 연상하든 도자기를 연상하든 그건 자유다.
그림의 명제가 <꽃 혹은 금빛화병>이지만 사실 이것은 꽃도 아니고 금빛화병도 아니다. 그저 꽃 혹은 금빛화병이라는 하나의 관념을 그린 것일 뿐이다. 관념을 그렸으니 허상이 아니냐고? 맞다. 그러나 또 아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에는 아름다운 관념과 현상이 수없이 많다. 그림도 그 중 하나다. 그림 감상이란 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의 환멸감에 몸서리치는 것보다 관념의 미학에 젖어드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또 매력적인 일인가!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 <꽃 혹은 금빛화병>-호일아트(은지화), 30cm ×44cm ~ 이중섭의 담배 은박지 그림에 착안하여 개발한 독창적 미술 기법. 주방용 쿠킹 호일 위에 아크릴 물감을 여러 번 올린 뒤 한지로 배접한 작품. 공정이 좀 복잡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종이나 캔버스 그림과 달리 아주 묘한 느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