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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Jan 22. 2019

한겨울, 오아시스를 만나다?

ㅡ 낙서 방명록

공교로운 일이다. 약속이 있어 방금 집을 나왔는데 하필 그 때 문자가 왔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1시간만 늦추잔다. 해 짧은 겨울의 오후는 쓸쓸하다. 매서운 바람조차 뒷덜미를 아리게 쓸고간다.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어떡한다? 마침 까페가 눈에 띈다.


간판이 생긴 지는 두어해 된 것 같은데 들어가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갤러리 까페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이름값을 하는 거 같진 않다. 웬만한 까페라면 으레 걸려 있게 마련인 그림 몇 점이 인테리어처럼 벽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찬찬히 그림을 더듬어본다. 반추상의 작품들은 꽤 봐줄 만한 수준이다. 짐작컨대 까페 주인의 작품일 것이다. 주문한 차를 내려놓을 때, 짧은 순간 손등에 묻은 물감을 보았기 때문이다.


혼자 무료하게 앉아 주변을 살피니 맞은편 소파 의자에 때가 꼬질꼬질한 노트 한권이 눈에 띈다. '낙서 방명록', 아마도 까페를 거쳐간 사람들이 써놓은 사연들일 것이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한장씩 넘기며 읽어본다. 온갖 시시껄렁한 낙서들 틈에 보석 같은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용으로 봐서 내공있는 미술인이 쓴 게 틀림없다.


ㅡ 자신의 길 위에서 힘들어 주저앉는 미술인들을 종종 봅니다. 만약 그대가 새로운 미술 세계를 개척해가고 있는 중이라면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찍부터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의 작품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그대가 내놓은 음식에 아직 대중의 입맛이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이는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를 헤메며 혹독한 시련을 견디었듯이 사막을 걷는 외로움과 갈증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세기 최고의 천재 미술가로 꼽히는 피카소조차 처음 큐비즘을 들고 나왔을 때 다들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ᆢ! 우리가 먹는 된장 고추장도 숙성이 되어야 맛이 나듯이 미학도 익숙함에 길들여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대가 지금 사막을 걷고 있다면 너무 늦지 않게 오아시스를 만나길 기대합니다. ㅡ


이제 어둠이 점령군처럼 스멀스멀 사방을 잠식해 들어올 모양이다. 그만 여기서 나가야겠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메아리처럼 글귀가 맴돈다. 나는 이미 글귀 속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으니 1년쯤은 지치지 않고 내 길을 걸을 수 있겠다. 어떤 분야든 자신의 길을 걷는 다른 모든 분들에게도 오아시스가 되기를ᆢ.


(* 긴 글이 따분할 테니 그림 하나 첨부해본다.)

● <꽃과 달항아리> - 호일아트(은지화), 25cm×34cm ~ 쿠킹호일 위에 아크릴 물감을 여러 번 올린 뒤 한지로 배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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