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첫날, 열차 시간을 맞추려 허겁지겁 대합실로 향한 때였다.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마치 거기서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목청껏 나를 부른다. "잠깐요, 잠깐만요ᆢ나 어때요, 멋지지 않나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즉시 핸드폰을 꺼내들고 이리저리 각도를 옮겨가며 셔터를 누른다. 결국 열차를 놓친 댓가로 사진 몇 장을 얻었다.
설이라고 해도 옛날의 고향 분위기를 잃은 지는 오래다. 만날 친구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다. 특선영화를 보는 것도 지쳤을 무렵 무심코 핸드폰 사진을 꺼내본다.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인다. 철심 하나를 두고도 한의사는 침을 연상하지만 목수는 두드려 박아야 할 못을 연상한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다. 건설 시공업자의 눈에는 못쓰게 된 평범한 보도블럭에 불과하지만 내 눈에는 달리 보인다. 제멋대로 금이 간 비정형의 조각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워보인다.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혹은 말레비치의 작품 못지 않다. 이 사진을 모티브로 삼아 그림 몇 장 스케치를 하고, 급기야 헛된 공상과 망상에 빠져든다.
미술이 미약하게나마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 미술이 전시장 안에 갇힌 감상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밖으로 튀어나와 대중의 일상에 유익한 그 무엇이 되자는 것이 공공미술의 근본 취지라면 이 깨진 보도블럭이야말로 좋은 모티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공상 프로젝트 1단계 ㅡ 공익 목적의 미술관련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는다. 그 자금으로 역과 협의하여 일부 깨진 보도블럭을 철거하기 시작한다. 아주 조심스럽게ᆢ!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 아주 조심스럽게ᆢ! 왜냐하면 이 금간 보도블럭이 예술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금이 간 모양 그대로를 떼어내 틀을 만들어 작품화시킨다. 이깟 금이 간 보도 블럭이 무슨 작품이 되냐고? 흠ᆢ 화장실에 두면 소변기가 되지만 전시장에 두면 작품이 되는 세상이다.
● 공공 프로젝트 2단계 ㅡ 미술단체와 협력하여 이 금이 간 보도블럭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아 작품을 창작한다. 창작물이 완성되면 그 작품의 사진을 넣은 보도블럭을 제작하여 철거한 보도블럭 자리에 다시 끼운다. 역앞은 보도블럭으로 인해 새롭게 거듭난다. 여느 평범한 역사가 아니라 예술품이 깔린 역앞을 시민들이 오간다. 일상과 예술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곳이 유명해지면 그것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몰려올 수도 있다. 주변의 상권도 더불어 활기를 띤다.
● 공공 프로젝트 3단계ㅡ 1단계 2단계를 거치면서 나온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연다. 작품이 판매되면 그 수익금을 기반으로 새로운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나선다. 이것이 활성화되면 문화가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데 작은 조약돌 하나 놓을 수도 있겠다. 그 엄혹하던 일제시대, 항일투쟁에 매진하던 김구 선생이 꿈꾸던 독립된 나라는 강성한 국가도 아니요, 부유한 국가도 아니었다.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였다. 높은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남에게도 행복을 준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 ps => 이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창한 공상은 끝내 공상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ᆢ 조선시대 노비 출신의 어무적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