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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너의 하루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27일 자

by 재섭이네수산

새벽부터 눈이 왔다. 아무리 눈이 많이 온다고 해도 결단코 나를 막을 수 없어 라며 호기롭게 출발한 출근길이지만 눈길에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걸 보자마자 아 출근하자마자 퇴근 마렵다.




지형 씨가 퇴근 시간에 맞춰 내 회사 앞으로 와주었다. 그러곤 눈이 많이 오니 내 퇴근을 도와주는 것으로 데이트를 대신하자고 했다. 지형 씨의 자상한 배려에 나는 가슴 가득 찐한 감동을 챙겨 담으며, 남몰래 그와 발걸음을 맞추며 걸어가며 저혼자 즐거워했다. 알아차렸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지형 씨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조금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발길을 뚝 멈췄다. 그러곤 눈빛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총총총 부끄러운 듯 몇 걸음 걸어가 그의 약간 옆으로 가 섰다. 그러자 그가 더 가까이로 다가왔다.

"옆에서 걸어줘요. 내 옆에 소영씨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옆에 서서 발을 맞추며 걸어서 우리 집 앞까지 다다랐다.

"고마워요. 눈이 너무 많이 왔어요. 조심히 가세요."

"이대로 보내려고요? 차 한 잔 안 돼요?"

조금 망설여졌다.




"집이 좀 지져분해서요."

"정말 그렇네요. 차만 마시고 얼른 가야겠어요."

아! 저 말없는 그 사람이 농담이란 걸 했다. 로보트 같은 몸짓과 말투만 가지고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런 능글거리는 농담도 할 줄 알다니! 다른 사람이 했으면 할켰을 농담인데 지형씨가 하니 어머나 하는 경이로움으로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감기가 다 나은 것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차라곤 믹스커피뿐이네. 어머 미안해요. 대신 두 봉 타드릴게요."

지형씨가 웃었다. 다른 사람이 웃었다면 "비웃냐?" 했을텐데 지형씨가 웃으니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하면서 경이로운 것으로 보아, 점심 때 누가 내 밥에 약을 탄 게 틀림없었다.


'저 사람을 일찍 내보내지 않으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위험하다. 빨리 내보내자.'




그때 내 초조한 심정을 알기라도 한 듯 초인종 소리가 내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초인종 소리가 방정맞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큰일이다. 인규 선배 같다. 느낌이 온다.

"날래 날래 열라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문을 열자마자 터지는 인규 선배의 입을 막으며

"지형씨 있다. 살려줘."

"알았어 알았어. 내가 구해줘야지. 지형씨를."

그러면서 눈치 없는 인규 선배가 방안으로 쳐들어갔다.

"지형씨~~ 구해주러 왔어요. 꼬리 아홉개 달린 구미호 방에 제발로 걸어 들어오셨을리 없고. 분명 저 여인에게 홀리어, 아니지, 홀리는 것보다 힘이 센 구미호니 들배지기로 한 판 당하고 납치 당하셨구나!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저 입을 발로 때려주고 싶었다. 손도 아깝다.

"나가자. 말로 하는 건 이번까지만이다."

"아니에요. 저도 인규 팀장님 좋아합니다."

"저도 지형씨 사랑합니다~~!"

이렇게 삼각관계가 되어버렸다.




지형씨에게 차를 빼달라는 전화가 오면서 우리의 만남은 시작과 함께 일단락 되었다.

"먼저 가세요. 뒤따라 가겠습니다."

"왜 안 가? 빨리 가."

나는 인규 선배의 등을 사정 없이 밀었다.

"밀지 마. 이거 받아. 어렵게 구했다."

그가 내민 것은 새 휴대폰이었다.

"아 어떻게 구했어? 다 쉬는 날이던데."

"어렵게."

"고마워. 이럴 땐 또 쓸모가 있어요. ㅎㅎ"

"너의 하루에 내가 없어서야 되겠어?"

"헛소리만 안 했으면 딱 고마워까지. 좋았을 텐데."




그리고 두 남자가 나간 후 기분 좋게 믹스 커피 두 봉을 타 마시며 신나게 휴대폰을 옮겼다. 내일까지 눈은 계속 내릴 것이고, 영하의 날씨로 떨어진다는데, 더이상 춥지 않았다. 왠지 이번 설날은 두근거리는 일들로 가득 찰 것 같은 이상한 기대가 꿈틀댔고, 판이 엎어졌다. 어제의 고독 속에 희미한 점같은 반딧불이 희망이 방점을 찍으며 퍼져나가더니 모락 모락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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