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by 재섭이네수산

며칠 전 수원에 다녀오며 몇 년 전에 일을 해드렸던 화가 선생님 댁에 들렀다. 오랫만이라 인사드리며 집안에 소소하게 손봐드릴 곳은 없는지 봐드렸더니 너무 고마워하셨다. 그리고 그때도 내게 당신 자신 직업이 화가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나는 다시금 "화가셨어요?" 하며 놀랬다. "그때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어떻게 나보다 더 정신이 없어?" 하며 놀리셨다.


집안 곳곳 손봐준 것이 번번히 너무 고맙다며 오늘은 꼭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때다 싶어 "화가시면 그림 한 점 주세요!" 그랬더니 "그림은 뭐하려고?" 하셨다. "팔자 고치게요. 그림값 오르면 막 부자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내 그림은 추상화라 가끔 어떤 정신나간 사람들이나 사지 아무도 안 사. 그리고 그림은 그림에 대해 아는 사람한테나 가치가 있지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한테는 필요없는 종이 쪼가리야." 뭐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날은 화가 선생님 성함을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았는데, 추상화라 봐도 모를 거라고 하셨는데 한방에 너무 멋진 그림으로 보여 굉장히 후회했다. 더 졸라서 한 점 받아오는건데... 팔자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ㅎㅎ



우리가 어릴 적에 오빠네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신 적이 있는데, 오빠가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그림솜씨를 가졌다며 꼭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오신 것이었다.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기에 선생님까지 찾아오셔서 신신당부를 하신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우리 어릴 때 오빠가 볼펜 하나로 꽃병을 그려놓았는데, 순간 어떤 화가가 그려놓은 그림인 줄 착각했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오빠는 자신이 우리집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엄청난 책임감을 일찍이 가진 탓에 스스로 붓을 꺾었다.


동생은 또 어떠한가? 시와 그림을 같이 그려넣는 시화로 어떤 그림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왔는데, 엄마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액자로 만들어 거실 벽에 붙여놓으셨더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나는 그림을 엄청 못 그린다. 그림을 못 그리다 못해 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방학 때마다 있는 미술 숙제를 동생이 버린 그림을 가져다가 내곤 했다. 한 번은 동생이 그린 미래도시 그림이 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리려고 하는 것을 내가 버려주겠다고 하면서 빼돌려 학교 숙제로 냈다가 덜커덕 게시판에 게시가 된 적이 있었다. 내 이름을 달고 있는 그 그림은 두 살이나 어린 내 동생이 그린 그림이었기에, 게시판 앞을 지날 때마다 나에게 굉장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안겨주었던 사건으로 기억 된다.


옛날에는 그림 그리면 밥 빌어먹기 딱 좋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그림을 잘 그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그 한 예로 몇십년 전만해도 만화가 하면 별로 환대 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는데, 요새는 웹튠작가로 인기를 끌면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림을 좀 잘 그렸다면 나는 만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접한 만화의 세계에 빠져들어 오랜 시간 헤어나오지를 못했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본 만화책이 이미라 작가의 "인어공주를 위하여"였고, 그 다음이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딸들" 이었다. 그 다음으로 읽은 것이 강경옥 작가의 "별빛속에"였는데, 이 세 작품은 몇 년이 흘러 소장용으로도 구매했었는데, 대학 들어가며 이사를 한 다음에 모두 버려졌다는 슬픈 사실. 어릴 적 그림 잘 그리는 동생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잘 쓰는 내가 스토리 작가가 되어 함께 만화책을 내자 공모하기도 했었다.


번외로 동생이 "슬램덩크"라는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전권 구매해놓았었는데, 우리가 한동안 얼마나 그 만화에 심취했는지, 가끔씩 꺼내보며 "왼손은 거들뿐" 이런 대사를 따라하곤 했었다.


에전에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를 쓰신 이현세 작가님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고등학생 이현세님의 그림을 보고는 색채가 아주 독특하다며 극찬을 하셨을만큼 그림을 잘 그리셨기에 미대는 따놓은 당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미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적녹 색맹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색맹은 미대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방황하시다,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 흑백으로만도 그릴 수 있는 만화를 선택했다고 하셨다.


그림 얘기를 하다 만화 얘기까지 흘러가는 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글의 마무리는 내가 가장 애정하는 강경옥 작가님의 "별빛속에"에서 나오는 대사 하나를 적어놓고 마무리지어야겠다.


"인간은 소리치고

신은 얘기하고,


인간은 절규하고


신은 속삭이고"



"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세상을


신의 뜻대로


혹은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


손가락 하나 하나의 움직임이 느껴지 듯


하나 하나의 선택이 수만 가지의 길로 통하고 있다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신이지만........


그렇게 해서 내가 만들어낸 현실이


신의 아량으로 되었건


내 자신의 능력으로 되었건


그래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존재하고


나는 계속 선택해야 하고


그런 반복의 반복을 겪으며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언제나 단지 그것 뿐...


언제나 기다리며


이 시간에 나의 길을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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