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결혼 일기 - 2월 1일 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통성명 이상 아무런 리액션도 없었고,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것은 그가 잔뜩 화가 나 있을 때 신입인 내가 윗분의 명령으로 커피를 갖다주면서부터였다. 화가 나 멀찍이 떨어져있는 그에게 다가가 나는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는 물론 안 마신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그런 그에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드세요"하며 "받으실 때까지 못 간다"며 애원을 했었다. 완고하던 그가 처음으로 얘 뭐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던 그 날의 기억이 날카롭게 떠올랐다.
그는 고집이 셌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한 번 자기가 맞다고 판단 되면 빠꾸가 없었다. 물론 그 날은 우리 선배가 모임 장소를 잘못 알려주어 혼자 외딴 곳에서 기다리다 아주 늦게 제대로 된 약속 장소로 왔고,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그가 쪽팔림과 열받음으로 인해 고집을 부렸던 것인데, 익히 그의 고집을 아는 윗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황소고집의 그에게 커피를 주라는 커다란 미션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신입인 내가 해냈다. 그토록 완고한 그에게 커피를 쥐어주고 온 내게 모두가 경이로운 눈빛을 발사하셨는데, 어떤 분은 심지어 박수까지 쳐주셨다.
나의 첫 단합대회 때 그는 어떠했나? 그의 여자 동기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맞붙는 날이 참으로 많았다고 한다. 첫 나의 단합대회 때도 그 두 분이 경기 룰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맞붙었다가 그가 자기는 안 하겠다며 운동장을 이탈하였는데, 또 내가 가서 완고한 그를 데려오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었다. 어땠겠는가? 나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결국 그를 운동장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나는 점점 그를 돌이키게 하는 전문가가 되어갔고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느낌 그대로 그는 지금도 완고하고 자존심 강하고 투박한 말을 쓰는 참 멋대가리 없는 남자이다. 그러나 한 가정을 책임질 줄 아는 책임감을 장착하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람이다. 한 번 정하면 빠꾸라는 법이 없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끊임없이 설득하면 언제든지 나에게 져주는 사람이다. 처음 그대로 나는 몇 십년 간 그를 설득하고 끝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내는 위대한 그의 부인이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운명이었나보다. 그에게 쥐어준 커피처럼 안 하겠다 우기는 그를 돌이키는 중재자,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나.
물론 우리는 지금도 어린 아이처럼 사사건건 투닥대며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다. 한 날에 지구를 떠나야 한다며 서로에게 세뇌 중인 막역한 호연지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