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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에게 겨울을 밝혀주던

할머니, 이제 별이 되셨나요?

by 재섭이네수산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은 우리 보다도 우리의 방학을 더 간절히 기다리셨다. 우리 두 자매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게, 엄마가 바쁘시기 때문에 방학이면 친할머니 댁으로 우리 외할머니가 우리를 데려다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댁으로 가는 기차는 늘 비둘기호 완행열차였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기차는 모조리 그렇게 간이역까지 일일이 꼼꼼하게 다 들려서 다니느라 12시간은 타야만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엄마와 할머니 댁에 가던 날 드디어 통일호와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는데, 왜 외할머니는 그렇게 힘든 비둘기호를 선호하셨을까? 절약. 우리는 시간이 남아도니까 시간을 써서 싼 비둘기호를 타는 것이 돈 버는 것이었다.


외할머니께서 우리에게 용돈을 주실 적엔 곱게 차려입으신 한복의 치마를 치켜 올리고, 그 안에 속바지를 살짝 내리시면 쌈지가 나오는데, 그 안에 꼬깃꼬깃 접어진 쌈짓돈을 꺼내서 주셨다. 그래선지 나는 어린 마음에 우리 할머니는 정말 돈이 없는데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해서 쌈짓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우리들 용돈을 주시는 거라 늘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눈이 엄청 많이 오던 겨울이었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비둘기호를 타고 밤이나 되어서야 광주역에 도착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무릎까지 푹푹 빠지고 있었다. 광주터미널에서 화순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탄다고 버스터미널에 기다리고 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버스가 늦어지고 있었다. 따뜻한 부산에 살던 우리는 살 떨리는 추위에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있었지만, 여행이라는 설렘에 추워도 춥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언제쯤 버스가 올지, 그것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런 우리가 딱해보였나보다.

"아가, 국밥 한 그릇 먹으련?"

물어보셨다. 그러나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추우면 내복 하나 사주련?"

물어보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춥지 않아?"

물으셨다.

"할머니 돈 없잖아요. 우리는 괜찮아요. 춥지 않아요."

외할머니가 갑자기 우리를 측은하게 쳐다보시더니 조용히 가만히 꽉 껴안으셨다.


그 겨울 저녁이 왜 춥지 않았겠는가? 정말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추웠다. 코구멍 안이 서걱거리며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겨울 저녁 추위에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추워서 몸서리치고 있었으나 할머니의 그 가만한 포옹에 우리는 갑자기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칭찬했다. 아~ 괜찮다고 하길 잘했다. 우리 할머니가 속바지 속에 숨겨놓은 쌈짓돈을 꺼내쓰지 않게 했으니까 참 잘했다 어린 마음에도 참 뿌듯했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따뜻했다. 시린 하늘의 푸름이 고왔다. 겨울이 주는 향내가 좋았다. 콧속에 맺히는 고드름 같은 서걱거림이 주는 아련함이 내겐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겨울은 온돌방 아랫목을 내어주시던 할머니의 품이 더욱 따스한 계절이 되어주었다.


할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걷는 것이 가슴 시리도록 즐거웠다.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그 길에 서서 할머니가 먼저 가 있는 하늘의 푸름을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 닦는 중년 여성이 되었지만, 나를 잡아주었던 따뜻한 손길과 내게 건네주었던 따스한 염려와 나를 감쌌던 온화한 포옹과 내게 내밀던 꼬낏한 쌈짓돈을 기록한 할머니와 나의 겨울 앞에선 언제나 어린 아이가 된다.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았던 숱한 겨울의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기에

내가 할머니가 된다 해도 나는 다시 아이가 되어 그 겨울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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