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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아침부터 섭섭하게. 그러나 여보~방정환!>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2월 8일 자

by 재섭이네수산

아침부터 차에 실린 짐을 빼내느라 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아침이라기엔 아직 해도 채 뜨기 전, 새벽이었다. 깜깜해서 뭐가 잘 안 보이다 보니 짐을 내리다 짐 하나가 내 발 위로 떨어졌는데, 제법 묵직하니 발등이 너무 아팠다. 나는 아 단말마 비명을 질렀는데 남편이 "그러니까 막 잡아 당기지 마." 하는 거다. 아니 내 발등에 떨어져서 내가 아프다고 하는데 어째서 괜찮아가 아니라 조심해라는 말이 먼저 나올까? 싶어 나는 몹시 화가 났다. "괜찮냐는 말부터 해야지!" 그래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짐을 다 내린 뒤 나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차에 올랐다. 남편은 화를 내는 나 때문에 화가 났고, 나는 나보다 짐짝을 더 소중히 여기는 남편 때문에 화가 났다. 그렇게 1시간을 아무 말 없이 직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문득 연애 시절이 생각났다. 눈이 많이 내린 언덕에서 행여나 내가 넘어질세라 내 손을 잡아끌어주던 그 아니었던가? 행여나 내 옷이 젖을 새라 깔고 앉으라며 자신의 점퍼를 기꺼이 내어주던 그 아니었던가?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연애 때 많이 먹는 애인을 보면서 "참 복스럽게 먹네요." 하던 것이 결혼하고 1년이 지나면 부인에게 "돼지처럼 처먹긴"이라고 한다더니 딱 그 짝 아닌가? 아침부터 서운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하루종일 남편에게 툴툴거릴 작정이었다.


나는 남편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 한 번 한 적 없었고, 남편에게 물어볼 게 있어도 물어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해버렸다. 그렇게 진짜로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일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남편이 미안했는지 내 자리에 수저를 가지런히 놔주었다. 흥칫 하면서 내가 남편을 째려보았는데, 그가 나에게 찡긋 윙크를 하며 손가락 하트를 날리는 것이 아닌가?

"뭐 하자는 거야?"

"화 풀어. 미안해."

"당신 너무 한 거 아니야? 내가 짐짝만 못해? 마누라 발등에 짐이 떨어져서 아프다고 하는데 조심하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진짜 오만정 떨어졌어."

"발등에 떨어졌어?"

"그래. 내가 아프다고 비명 질렀잖아."

"아니 난 짐이 떨어지는 소리에 당신이 놀라는 건 줄 알고 그러니까 잡아 당기지 말라고 그런 거지."

"뭐야?"

"당신 다친 거 알았으면 괜찮냐고 했지. 오해하지 마~"

그가 살갑게 웃으며 내 팔을 잡고 흔드는데, 이를 어찌하리오.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남극 북극 빙하가 녹아난다더니 오늘 아침 꽁꽁 얼어버린 내 마음에 그를 향한 섭섭함으로 쌓아 얼린 빙하가 그 미소와 윙크 한방에 단숨에 녹아내려 버리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내 마음의 얼음은 빙하가 아니라 얄부리한 살얼음에 불과했나 보다.

남편이 내게 말했다.

"여보, 방정환~"


얼마 전 남편과 방정환교육센터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바깥 벽에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 속에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미소와 함께 손하트를 날리고 계셨다.



"저 그림 너무 재밌지 않아?"

그러면서 우리 둘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 뒤로 우리는 일하다가도 서로 미안한 일이 있으면 우리 둘만 아는 언어로 "여보, 방정환" 그랬다. 그러면 내가 "응. 소파" 그런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는 거야?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데, 우리는 그게 더 재미가 있었다. 사랑한다는 우리만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직까지 이렇게 서로 유치한 장난을 나눌 수 있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절로 마음에 수긍이 되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오늘 트로트의 황제 송대관 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였다.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 남의 얘기 같지 않아 더 마음이 아픈 요즘, 남편이 나와 오랜 친구로 건강하게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새삼 또 들어, 남편의 까칠한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여보,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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