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숫기가 전혀 없던 나는 무대공포증까지 있어서 연극은 정말 너무 두려운 영역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그런 나를 알아보셨는지
국어시간 반에서 하는 연극에서 나에게
대사는 전혀 없고 그냥 뒷 배경인 소나무 역할을 맡겨주셨다.
허걱.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걱정에 몸서리 쳐야 했다.
대사가 없는 것은 너무 감사했는데 이렇게 큰 내가 어떻게 소나무가 될 수 있지? ㅜㅜ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문방구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큰 종이를 달라고 했다.
가장 큰 규격은 전지였다. (788×1090)
그러나 그 전지도 내 몸을 다 가려주지 못했고, 나는 너무 절망했다.
그래도 그거라도 사가지고 와서
책을 보고 소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지를 채우려고 하니 몇 시간을 그렸던 것 같다.
크레파스로 색칠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큰지
이파리 하나 칠하는데도 크레파스 하나를 다쓰고,
시간도 한참 걸려서, 낮부터 그렸는데 저녁이 되고 있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끙끙대고 있는 내가 걱정이 되었던 우리 가족들은
"뭐하는데 그래?"
물었고 나는 아기처럼 징징대며
"소나무를 그려야 해."
그랬다.
그때였다.
상황을 들은 우리 가족들.
온 가족들이 달려들어
"우리가 칠해줄게."
하나씩 이파리, 줄기, 바탕 등등을 맡아주어 색칠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도와준 덕분에 결국엔 대형 소나무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크레파스는 동이 나고 바야흐로 한밤이 되었지만 말이다.
잠도 설치고 아침이 되었다.
전지 소나무가 행여나 구겨질까 조심스레 돌돌 말아서 머리끈으로 고정 시킨 다음
아침부터 초조한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운명의 국어시간.
드디어 연극을 상연하는 시간에 도달하였고,
내 심장은 제세동기에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사람마냥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연극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발맞추어
나는 주인공도 아닌데 주인공보다 더 떨며
제일 뒷자리로 가서 섰다.
그런데 그때!
나와 같이 배경을 맡은 다른 나무들은 얼굴만 가리면 되는 A4용지를 꺼내드는 것이 아닌가!
아~ 내가 저걸 몰랐네.
아~ 나는 내 몸이 소나무가 되어야 하는 줄 알고....
아~ 이 얼마나 융통성이 없고 모지란 생각을 가졌단 말인가.
나는 너무 부끄러워 가져온 전지를 만지작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준비해간 소나무를 그린 전지를 쫙 펼 수밖에.
아쉽게도 내 얼굴부터 내려온 소나무는 내 다리를 채 가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소나무다웠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그런 내 얼굴이 소나무에 가려져 친구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실이 마냥 다행스럽기만 여겨졌다.
순간 온 반에 "우와~" 하는 감탄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나무 그림에 가려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나는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연극이 끝날 때까지 소나무가 되어야 하기에
무거운 전지를 들고 끝까지 뒤에 서 있어야 하는 나는
팔때기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것을 꾹 참아가며
혼자서 나 자신과 싸우며 중노동 중이었다.
아~ 드디어 연극이 끝이 났다.
나는 덜덜 떨리는 팔때기로
소나무가 그러진 전지를 돌돌돌돌 말았다.
그리고 끝남과 동시에 복잡한 심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 진짜 하얗게 불태웠다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대사도 없었는데 말이다. ㅎㅎㅎ
떨렸지만 잘했어.
그 부끄러움과 떨림을 이겨내고 전지를 떨구지 않고
끝까지 잘 붙들고 있었던 내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선생님께서 반 친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누가 제일 잘한 것 같아요?"
아이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소나무요~~"
에잉?
뭐라고?
소나무라면......
나?
배경이었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선생님은 소나무를 한 나를 일어나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나는 어벙벙하게 일어났다.
"대사도 없고 그저 배경에 불과했던 소나무를 그렇게 열심히 그려오다니, 선생님은 생각도 못했어.
정말 잘했어. 그 어떤 주인공보다 소나무가 빛났어.
대사도 없고 앞으로 나올 일도 없어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자그마한 역할에도
꾀를 부리지 않고 정성과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소나무에게
선생님은 감동 받았어. 우리 모두 박수를 보내주자."
그냥 융통성 없는 8살이던 내게 그 사건이 어떤 큰 깨달음을 주었겠는가?
그저, 그 칭찬이 뜻모를 굉장한 울림을 주는 날이었다는 것으로만 남아있었다.
50살이 된 지금에 가끔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비록 대사없는 소나무이지만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가장 멋진 일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내게 8살의 내가 말한다.
꼭 세상에 중심에 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아주 깊은 변방에서 누가 알아주기는커녕
가치없는 듯 무시 당하기 일쑤고
발길에 채이는 비루한 역할을 맡고 있을지라도
그 내 역할이 내게는 전부이기에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키워낸다면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나인 거라고 믿고 싶어지는
요일의 중심 수요일이다.
지금도 자신의 자리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푸르른 자신의 역량을 맑게 빛내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일등이라고 치켜세워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