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엔드 게임
독일의 극장은 각 극장마다 레퍼토리가 있어 몇 년에 한 번씩 이전에 무대에 세워진 작품을 다시 선보인다. 사무엘 베켓의 '엔드 게임'은 현재 베를린 독일극장 61개의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반갑게도 지난 1월 초 베를린에 체류하는 기간 베를린 독일극장에서 그의 작품 '엔드 게임'을 재공연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엔드게임 극대본은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관람 전에 그의 작품은 꼭 읽어야 했기에 집에 있던 그의 전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독일어와 한국어로 동시에 읽었다.
이 책의 저자인 사무엘 베켓은 1906년에 아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전공했다. 20대 때 프랑스에서는 영어교사로 아이랜드에서는 프랑스어 강사로 일하며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러나 어딘가에 소속된 일상 업무에 잘 적응하지 못해 일을 그만두고 경제적 어려움과 우울증에 시달린다. 193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는 작은 유산을 받는다. 덕분에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을 수년간 여행할 수 있었고 그때 얻은 영감과 자양분을 가지고 첫 소설 [중산층 여성을 위한 공정한 꿈](1932)과 [머피](1938)를 집필한다. 1937년부터는 파리에 정착했다. 하지만 사고로 칼에 찔려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즈음 미래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수잔 데슈보뒤메닐과 인생의 동반자가 된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부부로 살다가 나중에 아내에게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했지만 아내는 베켓보다 6개월 전에 사망한다.
1939년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다음 해 그 두 사람은 레지스탕스에 합류한다.
그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고국 아일랜드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에 남아 레지스탕스 대원으로서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구사하며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942년 동료들이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게슈타포를 피해 프랑스 남부 시골에 숨어 지내야 했다. 거의 2년 동안 농장에서 지내며 일을 했고 이 기간 1953년에 출간된 영어 소설 '와트'를 집필했다. 1945년 그는 적십자사에 자원하여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의 군 병원에서 통역사로 일하기도 했다.
1946~1957년 사이에는 프랑스어로 집필에 집중했던 시기이다. 이때 극대본 '고도를 기다리며'와 연극 '엔드 게임'등과 같은 작품들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둔다. 당시 프랑스에는 없었던 영국의 BBC 방송국에서 인기 있었던 라디오 연극 시리즈가 그를 통해 열리기도 했다. 또한 무성 영화 제작을 비롯해 공중파 연극을 연출하는 등 글만 쓰는 것이 아닌 다양한 형식의 작품 활동을 한다. 1969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평소 매체에 나서기를 꺼려했던 그의 성격상 시상식 및 모든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극대본을 집필하고 텔레비전 영화를 제작했으며 파리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탄생은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마주하게 된 새로운 현대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파괴된 도시는 재건되어야 했고,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개인적,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익숙한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은 정체성의 혼란은 물론이고 세상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다. 당시 많은 작가들은 기존 소설의 이상 세계에 대한 환상을 거부했다. 대신 자연적 현상과 전쟁의 경험에 더 중점을 두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현실과 사회를 주요 테마로 끌어올린 부조리극도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 작품들은 사회의 악덕을 감추지 않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허무함과 세상의 무의미함을 전면에 내세웠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48년 10월 9일부터 1949년 1월 29일까지 4개월 동안 프랑스어로 집필하였고 1952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품을 씀으로써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의미 없는 대화 즉 부조리 어법과 맥락 없는 줄거리를 더 극대화한다.
이 작품에는 5명의 등장인물과 허구의 존재 '고도'가 언급된다.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는 '디디'라는 별명을 가진 부랑자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주인공 에스트라공보다 육체적으로 더 강하고 강건하며 '고도'가 올 것이라는 믿는 낙관론자이다. 에스트라공은 '고고'라는 별명을 가진 부랑자 중 한 명이다. 기억력이 나쁘고 비관적이며 블라디미르와 함께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그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자주 떠나도록 허락해 달라고 블라디미르에게 요청한다.
포조는 권위주의적이고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짐꾼 럭키를 마치 노예처럼 대하는 포악한 인물이다. 그는 많은 짐가방을 들고 다니는 럭키를 목줄에 묶어 끌고 다닌다. 럭키는 포조의 짐꾼으로서 거의 노예에 가깝다. 포조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자주 운다. 2막에서 포조는 장님으로 등장하며 럭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소년은 고도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전령사이다. 2막에서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한다.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는 인물로, 그가 누구인지, 존재 여부도 불분명하다. 그는 실제로 나타나지 않지만 작품에서 그를 기다리라는 말이 반복해서 언급되어 두 주인공에게 기다림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극은 총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 첫 장면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길가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고도를 기다린다. 에스트라공은 종종 자신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데, 그때마다 블라디미르가 이를 상기시켜 준다.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많은 감정적 변화를 겪고 심지어 목매달기 놀이?까지 한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를 '고도' 그리고 그의 대답이 궁금해서 금방 포기한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만 대화로 이어지지 않고 마치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 형식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포조가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나타나 온갖 짐을 실은 하인 럭키를 동물처럼 몰고 온다. 두 사람은 포조와 그의 하인 럭키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그 대화 역시 무질서하고 무의미하다. 밤이 되자 심부름을 하던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내일 옵니다"라고 알려준다.
2막(다음 날)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 다음날 아침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같은 나무 앞의 같은 시골길에서 다시 만나면서 시작된다. 에스트라공은 어제 포조와 럭키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 동안 또다시 포조와 그의 하인 럭키가 갑자기 나타난다.
포조는 이제 눈이 멀었고, 럭키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조가 쓰러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두 사람은 이야기 끝에 포조를 돕기로 결정한다. 대화 도중 포조는 자신도 어제의 만남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화를 내고 럭키와 함께 자리를 떠난다. 심부름꾼 소년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오지 않고 내일은 확실히 옵니라"라는 소식을 전한다. 에스트라공은 차라리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만나기 위해 내일 이곳에 와야 한다고 또다시 상기시킨다. 두 사람은 나무를 보고 다시 목을 매달려고 했지만 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일 끈을 가져와 고도가 오지 않으면 다시 시도해 보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말로는 가자고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으며 막을 내린다.
스토리를 정리하면서 이게 스토리 인가 싶을 정도로 맥락이 없다. 시작과 끝도 없다.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은 다시 시작이다. 개별 섹션의 반복과 순환적인 사건의 순서만 있을 뿐이다. 아래의 대사는 무려 5번이나 나온다.
에스트라공: 어서, 가자.
블라디미르: 안 돼.
에스트라곤: 왜 안 돼?
블라디미르: 우린 고도를 기다리고 있잖아.
에스트라공: 아! 맞다. 그렇지.
캐릭터는 꼭두각시 같고 정체성이 없으며 과장된 일상적 상황뿐인 데다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다. 대신 방향 감각을 잃은 내면의 두려움, 집착 및 비극적인 상황만을 보인다. 하지만 각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낯설지는 않다. 기대와 희망, 그리움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인간의 감정이다.
그들이 갈망하고 바라는 대상 '고도'를 신이라고 부르든 행복이나 구원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비록 그 대상, 혹은 목표가 지극히 추상적이고 어쩌면 환상적일지라도, 그것은 존재의 방향과 지지를 제공하고 함께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포조가 주인(아버지)이라면 럭키는 노예(또는 자식)이다. 포조가 조련사라면 럭키는 훈련된 동물 또는 공연하는 동물이다. 또는 포조를 에고로, 럭키를 이드로 볼 수도 있다. 무궁무진한 극과 극이 제시될 수 있다. 인물의 관계성은 어딘가 닮은 우리 인간관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문뜩 혹은 종종 느끼는 불편한 감정, 여기서는 부조리라고 표현한 무언가를 청중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베켓의 의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연극은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 문학에 연결될 수 있으며, 특히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통해 그 연관성을 명확히 할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적어도 '고도'라는 환상?!의 대상을 기다린다는 희망이 있었다면, 엔드게임은 체스 게임에서 말이 몇 개 밖에 남지 않은 막판을 의미하는데 처음부터 끝을 향해간다. 이 연출은 나그와 넬은 생략된 버전으로 기울어진 무대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주인공의 서사, 상황, 시대 등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배경에서 이질적인 동작들과 오롯이 둘의 대화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간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대사와 상황이 반복된다.
Ende, es ist zu Ende, es geht zu Ende,
es geht vielleicht zu Ende.
끝! 끝이야 끝이라고 끝날지도 모른다고..
눈이 멀어 걸을 수 없는 함과 시력이 좋지 않지만 걸을 수 있는 클로브와 관계는 속박과 의지의 이중적 관계인 포조와 럭키를 연상하게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살아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까? 함과 클로브 또한 여전히 서로를 속박하며 의지하겠지! 마지막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극을 보며 떠올랐던 질문들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의 고도는 무엇이며 나의 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야기에서 소년은 "고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나의 고도 '이상과 목적? 목표'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나는 주인공처럼 수동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직접 찾고 싶어 하는가?
망각하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가?
블라디미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일상의 단조로움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시간이 헛되이 낭비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시간을 그렇게 흘러보내는 것은 무조건 무의미한가? 아니면 블라디미르처럼 늘 기억하고 이상을 좇아야 하나?
#고도를기다리며 #사뮤엘베켓 #엔드케임
[참고자료]
Beckett, Samuel: Warten auf Godot. Frankfurt am Main. Suhrkamp, Auflage 1971
Beckett, Samuel: Warten auf Godot. Seoul, Minumsa, Auflage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