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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te Jul 28. 2023

#3.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인가?

부록: 칼리굴라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어 알베르트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베를린 독일극장에서 재공연 되는 '칼리굴라'를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베켓의 작품이 부조리의 맛보기 버전이었다면 카뮈의 작품은 본격적 즐기기로 부조리 철학의 심오함을 이해하고 발전시키고자 선택했다고나 할까?



책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일은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깊은 자유를 누리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맺는다. 이 두 가지 명제를 가지고 시지프 신화 이야기를 열어보려 한다.


Es gibt kein Morgen.
Das ist von nun an der Grund meiner tiefen Freiheit.
Wir müssen uns Sisyphos als einen glücklichen Menschen vorstellen.

 이 책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지프 신화에 대한 내용은 고작 5 페이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신화의 비유는 카뮈의 행동 철학, 인간의 반항, 부조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집약되어 있다. 카뮈는 1940년경 연극 '칼리굴라', 소설 '이방인' 그리고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동시에 집필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미 1936년 그의 노트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도서 검열은 점점 더 엄격해졌고 그의 글은 1940년 1월에 이미 금지되었다. 카뮈는 철학 논문을 쓰는 대신 1941년에 완성된 [이방인]의 철학적 동반 텍스트로서 개인적인 문학 에세이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논증과 설명보다는 묘사에 치중했기 때문에 이 책을 철학서가 아닌 철학적 에세이라고 불렀다.




 카뮈가 실존주의 철학자인지 부조리주의 작가인지에 대한 질문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실존주의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실존 철학의 주된 흐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카뮈는 실존주의의 전형적인 기본 가정인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가정을 거부했기 때문에 자신을 실존주의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카뮈의 철학은 실존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종종 '부조리의 철학'이라고 불린다.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몬도비에서 태어났다. 당시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는데, 알제리로 이주한 가난한 프랑스 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카뮈가 갓난아기였을 때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했다. 카뮈는 청각 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지능을 보였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헌신적인 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고 폐결핵으로 인해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 1935년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의 공식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명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뮈는 1940년 독일 점령군에 체포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었다. 얼마 후 1942년 첫 소설 [이방인]을 출간하고 바로 큰 성공을 거둔다. 1944년 카뮈는 파리의 레지스탕스에 가입한다. 거기서 '콩바트(전투)'신문의 편집자로 일했다. 1945년 세티프 학살을 비롯해 1950년대 알제리 독립투사들과 프랑스 보안군 사이의 폭력적인 충돌은 카뮈에게 전체주의와 냉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양측을 모두 고려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1957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60년 1월 4일, 카뮈는 47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사고 당시 그의 코트 주머니에 미발표 원고인 [최초의 인간]과 사용하지 않은 기차표 한 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2년 후 알제리는 독립했다.




 카뮈는 이 책을 통해 부조리라는 주제를 경직된 정의로 다루지 않고 다양한 상황과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예를들면 일상생활에서 문득 다음과 같은 실존적 질문이 생길 때:


나는 왜 사는가?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실존적 질문에 대해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죽는다는 확신만 줄 뿐이다. 삶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과 그것을 찾거나 바라는 것의 허무함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것을 카뮈는 '정말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자살입니다. 삶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라는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카뮈는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물리적 세계에서 외면함으로써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자살은 부조리에 직면한 삶에 대한 태도가 아니며, 부조리에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죽음에 대한 거부가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오히려 자살을 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해 보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맞닥뜨린다. 카뮈는 부조리는 회피하거나 부정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특정 목표, 의미 또는 구원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요약하면 절망적인 부조리에서 세 가지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부조리를 통해 절망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난다. 둘째, 진정한 자유의 실현에 도달한다. 마지막으로 부조리는 거짓된 목표를 파괴하고 죽음만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실재임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환상의 가치를 상대화한다.


2장 '부조리한 인간'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맞서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연극배우, 정복자, 돈 후안을 부조리주의자의 예로 든다. 카뮈는 돈 후안이 사랑의 한계와 끝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배우는 무대와 배역의 한계를 알고 자신의 삶을 계속 재창조하는 부조리주의자이고, 정복자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행동할 자유를 얻는 부조리주의자라고 설명한다. 카뮈는 삶의 허무함과 유한함을 인정하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을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여겼다.


3장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마'에 등장하는 키릴로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보여 준다. 키릴로프는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살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증명함으로써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카뮈는 이를 해결책으로 보지 않고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본다.

이 장에서는 예술이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의미와 아름다움을 부여함으로써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 작품이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즐거움과 의미를 줄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이 죽음과 덧없음에 종속된 세상에서는 지속적인 효과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예술이 삶의 부조리를 견디게 하고 무의미한 세상에서 일시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예술은 가치 있다고 믿는다.


4장에서는 드디어 시지프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지프 신화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첫 번째 버전에서 시지프는 신들의 비밀을 폭로한 경솔함 때문에 지옥에 갇히게 된 이야기이고, 두 번째 버전에서는 시지프가 죽은 후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광장에 던지라고 아내에게 명령함으로써 아내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내가 명령에 순종하자 오히려 시지프는 아내에게 화가 났다. 아무리 남편의 명령이어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광장에 던질 수 있느냐며... 지옥에 떨어진 시지프는 아내를 벌하기 위해 플루타르크의 허락을 받고 지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아내를 벌하고 지옥으로 돌아가겠다는 신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지상의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이에 대한 벌로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라가게 하는데, 돌이 정상에 도달할 때마다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려오는 형벌을 몇 번이고 무한 반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카뮈는 왜 시지프를 선택했을까?


카뮈는 시지프가 자신의 형벌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시지프는 무의미한 형벌의 끝없는 순환인 자신의 운명을 절망하지 않는다. 결코 성취될 수 없는 막연한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형벌을 직시하고 끝까지 수행한다. 카뮈는 이러한 인내와 결단력을 삶의 부조리에 대한 본질적인 반항 행위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카뮈는 시지프스에게서 삶의 허무함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보았다.


 결론적으로, 삶의 유한성, 즉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직면은 두려움이나 불안, 회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인간의 의미에 대한 욕구와 세상의 의미 부재 사이의 갈등. 즉 이 딜레마에 대한 카뮈의 해결책은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것인데, 카뮈의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의미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세계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삶을 형성하고 의미를 부여할 자유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시지프 신화고도를 기다리며는 객관적 의미의 헛된 추구를 중심으로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카뮈가 삶의 부조리에 대처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베켓은 인간 존재의 무기력함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일상에서 적용되는 부조리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더 이어지길 기대하며 마치 카뮈가 낭송하는 것처럼 다음의 문장으로 긴 글을 맺는다.


당신은 행복한 시지프인가?
그렇지 않다면 내일은 없다.
그러니
죽음을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라!
Memento Mori und Carpe Diem!


부록: 베를린 독일극장에서 본 칼리굴라 후기

클래식 버전이 아니었다. 연출가의 손에서 모던하게 재탄생한 칼리굴라는 호불호가 갈렸다. 나를 비롯한 몇몇은 거북하고 불편했다고 반응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연출적 상상력에 매료됐다고 했다. 너무 기대한 탓인지 나의 연극 역사가 짧은 탓인  파격적인 연출은 철학적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방해가 됐다. 연출이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불편하기는 했다는 개인적 견해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절대 상연될  없는 수위의 연출이 무대에 세워질  있는 독일 극장 시스템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여하튼 그래도 언젠가는 칼리굴라의 클래식한 연출작도  보고 싶다.




[참고자료]

Camus, Albert (1942): Der Mythos des Sisyphos von Albert Camus, Hamburg, 2022

알베르트 카뮈 (1942): 시지프 신화, 번역 박은주, 서울, 2020

https://de.wikipedia.org/wiki/Albert_Camus

https://de.wikipedia.org/wiki/Existentiali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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