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는 아주 오래전에 읽었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멕시코에서 온 동기가 대학원 과제발표에서 언급하는 바람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소환됐다. 아쉽게도 밀리의 서재에는 한병철의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지난주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 이때다 싶어 도서관에 들러 그의 책 전부를 빌려왔다. 얼마 만에 읽는 한글로 된 종이책인가. 독일어가 아니라니.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철학서가 쉽게 읽힐 리가 없다.
10년 전에 읽은 피로사회는 놀랍게도 첫 문장만 기억이 났다. 그 뒤로는 모든 문장이 처음 읽는 것 같았다. 책을 읽고 글로 적어놓지 않은 책들은 대부분 이렇다. 이제 양보다는 질적인 책 읽기를 선언한 터라 읽고 나서 반드시 글로 옮기기로 했다.
한병철은 이 책에서 현대사회가 긍정의 과잉에 빠져들어 인간들을 단순한 성과기계로 만드는 성과사회로 발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해 내는 활동사회인 동시에 자유로운 강제 즉 자발적 착취로 인한 소진, 성과 주체자의 만성 질환인 피로로 이어진다고 보고 이 책의 첫 문장을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 마지막 챕터에서는 한트케의 ‘근본적 피로’를 언급하는데 근본적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이며, 이는 무엇을 하지 않을, 그만두어도 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목적 지향의 행위의 날들에서 해방되는 ’막간의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피로사회에서의 근본적 피로는 쉼을 준다고 나는 이해했다. 책에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피로가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주의적 피로인지 혹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지 분별하고 어떻게 풀어낼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준다.
고통 없는 사회라는 책도 비슷한 맥락이다. 피로사회에서 언급한 성과사회는 진통사회와 서로 조응하며 고통은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침묵을 선고? 받는다고 말한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그래서 이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 역할을 하는 좋아요! 가 소셜미디어뿐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고도 설명한다. 피로사회에서 근본적 피로의 ‘막간의 시간’이 쉼을 주듯, 고통을 긍정심리학으로 제거하려고만 하지 말고 문제를 발견하는 신호로 여겨야 한다고 보고 있다.
고통의 존재론이 고통의 필요성과 긍정론으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의 부제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야기해 볼 만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2023년 8월2일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수정보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