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마법
어김없이 새벽 달리기를 하던 중, 멀리 할머니 한 분이 쓰러져 계셨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져 오는 울음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달려갔다. 간신히 굴러가는 유모차 짐칸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가 꽂혀 있었고, 할머니의 손가락은 세월에 타들 듯 새까맣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시던 눈빛엔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흘러나온 세월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무릎을 낮추어 할머니의 눈높이에 맞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리신 듯, 할머니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끊어진 숨결을 잇듯 말씀을 토해내셨다.
"숨이 차서 그래요, 숨이 차서... 내가 심장 수술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해가지고...."
그 한마디를 마치자마자 금세 또 다른 이야기가 밀려왔다. 오래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리듯, 오랜 세월 눌러온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억눌린 강물이 둑을 무너뜨리고 흘러넘치듯, 할머니의 말은 숨 고를 틈도 없이 이어졌다. 이야기 속엔 오랜 세월 홀로 삭여온 상처와 외로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내가 서방을 잘못 만나서 그래, 서방을 잘못 만나서.. 자식들도 아들 딸 다 있는데, 다 지 아버지를 닮아가지고 날 보러 오지도 않고.... 내가 젊었을 땐 서방이 나를 마구 때리고... 이 팔뚝만 한 아기를 마룻바닥에 내던지고 말이야..."
나는 잠시 숨조차 고르지 못한 채 그 폭포 같은 말들에 휩쓸려 있었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얼마나 지독히 고독했으면, 이렇게 지나가는 낯선 이를 붙잡아 세월의 고통을 토해내실까. 그 마음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저 할머니의 이야기가 공기 속에 흩어져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의 아들과 딸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 곁에서 묵묵히 귀 기울이는 청자가 되고 싶었다. 할머니의 마음이 마냥 허공에 흩날려 버리지 않도록 곁에서 조용히 붙잡아 드리고 싶었다.
문득, 전에 읽었던 책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와이의 어느 섬에서 가난과 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30년 넘게 지켜본 연구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중 일부 아이들은 건강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부모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알아봐 주고 곁을 지켜준 단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그 존재가 그들의 삶을 버틸 힘이 되어주었다고.
보통의 마법(Ordinary Magic)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기적이 아니라,
단지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고
조용히 지켜봐 주는 순간들이
아이들을 지탱합니다.
- 앤 마스텐(Ann S. Masten)
결국 중요한 건, 세상의 큰 도움이나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어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라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말할 곳 없는 마음이 쌓이고 하루하루가 무겁게 흘러갈 때, 곁에 있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이 조금은 견딜 만해지던 날들. 나는 가끔 그 존재를 떠올리며 안도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단 한 사람이 되어 준 적이 있을까. 말없이 귀 기울이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하루를 버틸 구석이 되어주었을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상처와 외로움을 품고 살아간다. 누군가가 곁에서 조용히 숨결을 맞춰주고, 말없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켠이 조금은 놓이고, 하루의 무게가 천천히 가벼워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풀잎처럼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존재만으로 흔들림을 잠재우는 힘이 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지고 조금 더 버틸 만해지는 건 아닐까.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