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보았다. 그림자인가 하였는데 그건 어떤 낌새였다. 땅에서는 야릇한 것이 솟아오르더니 작은 꽃이 피었다. 멀리서 점차 가까이로 전해왔다. 나무는 움을 입에 물고 꽃이 되었다. 봄이라 부르며 반가운 손짓으로 맞았다. 노랑, 빨강, 분홍의 꽃들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다과도 준비하지 못한 빈 찻상만 든 채 반가운 손님을 맞는다. 눈도, 입도 연신 벙실거린다.
장대비가 내렸다. 꽃도 나무도 고개를 떨구고 사람들도 숨었다. 소리에 놀라 손님은 황급히 뒷문으로 달아났다. 아쉬움에 멍멍히 하늘만 바라본다. 많고 많은 비의 이름을 부른다. 꿀 비, 잔비, 는개, 꽃비, 가랑비, 모종비, 보슬비, 안개비. 다들 예쁘고 유순한 이름들인데 하필 찾아든 것은 장대비였다. 귀한 손님이 돌아간 집 처마 끝에서 낙숫물 소리가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같다. 가여운 마음으로 창을 열었다. ‘좍,좍좍’ 여전히 빗소리가 요란하다. 밤새 비 내리는 소리를 이명으로 들으며 잠이 들었다. 감질나는 봄날은 빗속에서 녹아내렸다.
아쉬움을 품고 가까운 숲을 찾았다. 백 년의 세월을 품은 성지곡 아름드리 편백 숲이었다. 언제나 높다란 기둥처럼 편백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나무의 생명의 수액들이 어떻게 이동할까, 생각해 보았다.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잎은 작고 몸통의 표피는 여러 겹 종이처럼 느슨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목마름에 지칠 때 한 겹씩 벗어내려 그리했을까. 도심의 매연들이 날아들고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간 잡다한 것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나무들을 생각했다. 내게 편백은 늘 그런 넉넉한 나무였다.
하늘이 울었다. 밤새 거친 숨소리를 내며 솟아지는 빗줄기가 숲 깊은 곳까지 씻어내렸다. 바싹 마른 숲을 넉넉하게 적셔주었다. 오랜 먼지가 씻기니 잎사귀도 제 색을 찾았다. 숲이 깊게 숨을 쉬었다. 온몸에 잔뜩 물을 머금었다. 더 이상 삼킬 수 없을 즈음 슬슬 몸 밖으로 물을 토했다. 오랜만에 맘껏 욕심을 부렸다. 검은 기둥의 무리, 작은 틈으로 실금처럼 찾아드는 햇살. 오랜 허기를 견디던 편백은 줄기 가득 외투인 양 물을 적셨다. 검은 숲은 편백의 여름나기 준비였다.
비 온 뒤의 숲은 수다스러웠다. 아이를 품은 엄마처럼 넉넉하였다. 곳곳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마른 골짝에서도, 작은 돌 틈 사이에서도, 메마른 대지에 막혔던 작은 틈새가 한꺼번에 열리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작은 발걸음을 옮겼다.
쏴!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렸다. 폭포 소리였다. 사철 졸졸 흐르던 작은 계곡은 커다란 폭포로 변해있었다. 계곡을 마주 보는 다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물은 좌우로 한번 겉돌다 한꺼번에 떨어졌다. 폭포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은 물의 기운들이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등줄기가 시원해졌다.
허전한 마음으로 찾은 숲에서 밤새 내린 것은 결코 장대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꿀 비였다. 봄 하나가 가면 또 여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어 시간의 산책길에서 마음이변덕쟁이가 되었다. 초록과 바람과 시원한 계곡의 폭포가 지나가는 깊은 숲으로 자꾸만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딱새의 울음소리에 숲길을 벗어났다. 하늘이 열렸고 햇살이 따가웠다. 그러고 보니 벌써 6월이다. 여름 절기가 된 것이다. 장대비가 와서 꽃이 간 것이 아니고 갈 때가 되었다. 단지 내 마음속에 봄을 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욕심이었다.
가끔은 겁내지 말고 장대비를 맞아보는 것도 좋겠다.
숲이 그러한 것처럼 충분히 품고 나면 흘려보내는 것도분명 있을 테니까.